공재(恭齋) 윤두서…호와 자화상에 담긴 갈등과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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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恭齋) 윤두서…호와 자화상에 담긴 갈등과 모순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10.27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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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⑳
▲ 공재 윤두서 ‘자화상’.

[한정주=역사평론가] 윤선도가 사망하기 3년 전인 1668년 해남 윤씨 가문에는 또 한 명의 걸출한 예술가가 태어났다. 그는 우리나라 미술사(美術史)에서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자화상’을 그린 선비 화가 공재(恭齋) 윤두서다.

윤선도에 뒤이은 윤두서의 등장으로 해남 윤씨 가문은 명실상부 호남 제일의 명문가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예술가 집안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한 집안에서 문학과 회화 양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연이어 나온 곳은 해남 윤씨 가문 이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윤선도와 윤두서가 대를 이어 땅 끝 해남에서 꽃 피운 예술혼은 그만큼 위대하고 찬란한 것이었다.

윤선도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가에 대해서는 오세창이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청죽화사(聽竹畵史)』를 인용해놓은 기록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백년 이래 처음으로 윤두서 한 사람만이 홀로 우뚝 솟아 그와 명성을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더욱이 오세창은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의거해서는 윤두서가 ‘인물화(人物畵)’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과 독보적인 역량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다.

“대개 물건은 반드시 대적할 상대가 있다. 화가(畵家) 역시 그렇다. 대대로 종장(宗匠)이 있어서 한 시대의 예술계를 차지하면 또한 반드시 상대하는 사람이 나와서 이름을 혼자 차지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강희안((姜希顔)이 출현하자 안견(安堅)과 최경(崔涇)이 나와 대적하였다. 신세림(申世霖)·석경(石敬)·이불해(李不害)·이상좌(李上佐)가 상호 대적하였고, 김시(金禔)가 출현하자 이정(李楨)과 학림정(鶴林正 : 이경윤)이 대적하였다. 또한 어몽룡(魚夢龍)이 출현하자 석양정(石陽正 : 이정)이 대적하였고, 김명국(金明國)이 출현하자 이징(李澄)이 대적하였다.

그러나 김명국과 이징이 죽은 뒤 백년 이래 처음으로 윤두서 한 사람만이 홀로 우뚝 솟아 그와 명성을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더욱이 그 명성은 예전 사람들보다 더 성대했다.” 『청죽화사(聽竹畵史)』

“대개 인물은 물론 동물과 식물을 그릴 때면 반드시 하루 종일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고서 그 진짜 형상을 얻은 다음에야 그렸다. 홍득구(洪得龜)라는 이가 윤두서의 용과 말 그림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공민왕(恭愍王) 이후 이러한 작품은 없었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 그 명성이 더욱 높이 드러났다. 인물화는 지나치게 잘 그렸지만 산수화는 그의 장기(長技)가 아니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별집(別集)」

윤선도와 마찬가지로 윤두서 역시 태어날 때부터 해남 윤씨 대종가(大宗家)의 대를 이을 종손(宗孫)은 아니었다. 윤선도는 17세에 남원 윤씨와 결혼해 윤인미·윤의미·윤예미 등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윤선도의 큰아들 윤인미는 윤이석을 두었는데 불행히도 윤이석은 마흔이 넘도록 아들이 생기지 않았다. 대종가를 이을 후사가 태어나지 않자 윤선도는 윤이석의 사촌동생인 윤이후의 아들 중에서 양자를 들이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윤이후는 이미 세 아들을 두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윤선도는 이들 중에서 양자를 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넷째 아들인 윤두서가 태어나자 윤이석에게 그를 입양하라고 했다. 가장 좋은 점괘와 사주팔자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결국 윤두서는 강보에 쌓인 채로 입양되었고, 이때부터 사망한 1715년까지 47년 동안 호남 제일의 명문 해남 윤씨 대종가를 이끄는 종손으로 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족보상으로 윤선도는 윤두서의 직계 증조부가 되었고, 윤두서는 윤선도의 직계 증손자가 되었다.

특히 윤선도와 윤두서의 사례에서 보듯이 해남 윤씨 대종가는 종손이 될 아들이 매우 귀했다. 그런데 윤두서는 무려 10남 3녀를 낳아 대종가를 크게 번창시켰다. 또한 윤선도가 문학에서 최고봉의 자리에 도달했듯이 윤두서는 문인화가(文人畵家)로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 해남 윤씨 가문의 명성을 크게 빛냈다. 윤두서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입양을 결심했던 윤선도의 뛰어난 선견지명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여하튼 이쯤에서 윤선도와 윤두서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접고 이제 윤두서의 호(號) 공재(恭齋)가 담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자.

윤두서의 호를 살펴보려면 반드시 그가 남긴 ‘자화상’을 함께 보아야 한다. 필자가 조선 선비들의 호에 얽힌 사연과 이야기를 추적하는 까닭은 그들의 삶과 철학 혹은 사람됨과 행적을 호만큼 간단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 이외에 그 사람의 인품과 감정까지 읽을 수 있는 드문 사례가 존재하는데 윤두서와 같이 ‘자화상’을 남긴 경우가 그렇다. 아마도 이러한 경우는 윤두서를 제외하면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표암 강세황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미술사에서 최고의 인물화로 평가받는 윤두서의 ‘자화상’은 일찍부터 미술 교과서에 실렸던 만큼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사람이라면 보고 싶지 않아도(?) 반드시 한 번 쯤은 보았을 그림이다.

필자 역시 윤두서의 ‘자화상’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전율을 새삼 생각해본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듯한 강렬한 눈빛과 멋들어지게 그려진 수염이 무척 인상적으로 남았던 기억도 떠오른다. 지금까지도 필자는 윤두서의 자화상에서 느꼈던 눈빛만큼 강렬한 눈빛을 가진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강렬한 느낌과 인상을 말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는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숙제거리는 윤두서의 친구였던 담헌(澹軒) 이하곤이 ‘자화상’를 보고 쓴 글을 보는 순간 단번에 해결되었다. 300년의 시차(時差)가 존재함에도 ‘자화상’을 본 이하곤의 감상평은 필자가 오랜 시간 머릿속에서는 뱅뱅 돌지만 말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 척(尺)도 되지 못한 육신(肉身)으로 사해(四海)를 초월할 뜻을 지녔구나. 긴 수염을 나부끼고 얼굴은 붉고 윤기가 도니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도사(道士)나 검객(劍客)인가 하고 의심한다. 그러나 그 정성스럽고 진실되며 물러나고 겸양하는 풍모(風貌)는 또한 독행(篤行)하는 군자(君子)라고 하기에 부끄럽지 않구나.” 『두타초(頭陀草)』, 「잡저(雜著)」, ‘윤두서의 자화상에 대한 찬문(尹孝彦自寫照小眞贊)’

이하곤의 글처럼 ‘자화상’ 속의 윤두서는 도사나 검객에 가까운 외양을 띠고 있다. 그런데 이하곤은 윤두서의 인품과 풍모는 군자(君子), 즉 선비라고 하기에 부끄럽지 않다는 말을 덧붙였다.

▲ 윤두서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고 전해오는 『중용(中庸)』 속에서 ‘공(恭)’자를 취해 자신의 호로 삼았다.

실제 공재(恭齋)라는 윤두서의 호를 살펴보면 ‘군자의 삶’을 살고자 한 그의 뜻과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윤두서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고 전해오는 『중용(中庸)』 속에서 ‘공(恭)’자를 취해 자신의 호로 삼았기 때문이다.

『중용』의 마지막 부분에는 ‘공(恭)’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 “是故(시고)로 君子(군자)는 篤恭而天下平(독공이천하평)이니라.” 이 말은 “이러한 까닭에 군자(선비)가 뜻을 두텁게 하고 공경(恭敬)스러우면 천하가 화평하다”는 뜻이다. ‘공경(恭敬)’으로 사람을 대하면 모두가 온순해지고 ‘공경(恭敬)’으로 세상을 다스리면 온 천하가 태평스럽게 된다는 얘기다.

따라서 ‘공(恭)’은 군자(선비)가 평생 동안 갈고 닦아야 할 최고의 덕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윤두서는 ‘공재(恭齋)’라는 호를 통해 자신의 삶을 꿰뚫는 철학은 다름 아니라 이 ‘공경(恭敬)을 갈고 닦는 군자(선비)의 길’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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