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치지 않은 경종 독살 비난…이인좌의 난과 탕평정국
상태바
그치지 않은 경종 독살 비난…이인좌의 난과 탕평정국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11.03 11: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사 읽기>② 영조의 양위(讓位) 소동과 탕평정치(蕩平政治)
◇ 글 싣는 순서
① 노론 당적의 왕세제(王世弟) ‘연잉군’
② “이복 형(경종)을 독살했다”는 비난 속에 왕위 오르다
③ 그치지 않은 경종 독살 비난…이인좌의 난과 탕평정국   
④ 당쟁을 막으려 양위 선언 하다…“나를 임금으로 대우하지 않는데 무엇 하겠는가?”
⑤ 좌절당한 탕평 세상과 다가오는 비극

[한정주=역사평론가] 영조가 즉위한 후에도 소론과 남인은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과 비난을 결코 거두지 않았다. 노론이 경종을 남인과 소론의 임금으로 보았듯이 소론과 남인 역시 영조를 노론의 임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 연잉군 시절의 영조 초상화.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조 31년(1755년) 5월 나주 벽서 사건의 토벌을 축하하는 과거시험장에서 나온 흉서(凶書)를 국문(鞠問)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소론계 신치운의 발언을 보면 경종 독살의 의혹과 비난이 얼마나 끈질기게 영조를 괴롭혔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전하께서 이미 이처럼 신을 의심하시니 자복(自服)하겠습니다. 신은 갑신년(甲申年: 경종이 사망한 해)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입니다.” 『영조실록』 31년(1755년) 5월20일

경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의심되는 세 가지 음식 중의 하나인 게장을 들먹이면서 영조를 향해 ‘당신이 경종을 독살한 것’이 내가 역심(逆心)을 품은 까닭이라고 말한 것이다.

30여년이 지난 후까지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과 비난은 떨쳐버릴 수 없는 악몽처럼 영조를 따라 다니고 있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영조는 평생토록 두 가지 콤플렉스의 그늘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그 하나가 경종 독살 의혹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친모 숙빈 최씨의 출신, 즉 신분이었다.

숙빈 최씨는 궁녀 중에서도 가장 천한 신분인 무수리였다. 조선의 신분제는 종모법(從母法)이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을 종합해볼 때 영조를 증오하고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은 정치 세력에게 그는 ‘이복형을 독살한 노론 당적의 천민(賤民) 출신 임금’에 불과할 뿐이었다.

즉위 초 영조는 의정부의 3정승을 모두 소론계인 이광좌, 유봉휘, 조택억 등으로 채웠다. 비록 노론에게 큰 정치적 빚을 지고 있었지만 노론의 임금이 아닌 모든 당파를 초월한 지존(至尊)의 대접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조는 지난 시절 ‘당쟁의 피바람’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였다. 경종에게 역심(逆心)을 품고 독살(毒殺)했다는 의혹과 비난을 벗고 스스로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영조는 다시 ‘당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경종 때 자신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주청한 사실을 역심(逆心)으로 규정해 노론 4대신을 사형에 처한 일과 경종을 암살하려는 역모에 가담했다는 ‘임인옥사(목호룡 고변 사건)’의 혐의를 그대로 두고서는 결코 떳떳하게 임금 노릇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조는 먼저 소론 강경파의 수장 김일경과 ‘임인옥사’의 발단이 된 고변 사건의 당사자 목호룡을 처단했다. 영조는 친히 김일경을 국문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김일경은 소론 강경파의 영조에 대한 생각을 아무런 가감 없이 솔직하게 드러냈다. 그는 영조의 친국(親鞫)을 받는 동안 ‘신(臣)’이 아닌 ‘오(吾: 나)’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노론의 임금일 뿐인 영조를 자신은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목호룡 또한 김일경 못지않았다. 결국 영조는 김일경을 참수형에 처했고 목호룡은 곤장을 맞다 죽자 다시 그 시체를 목 베었다.

이 사건 이후 노론이 나날이 기세가 오른 반면 소론은 모두 벌벌 떨며 사람의 얼굴색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론 강경파에 대한 영조의 처분은 멈출 줄을 몰랐다.

영조는 김일경의 ‘신축년(辛丑年: 경종 1년) 상소’, 즉 ‘왕세제 대리청정을 앞장서 주청한 조성복과 노론의 4흉(四凶)을 법으로 처단하라’는 상소에 참여했다는 죄목을 씌워 이진유 등 소론 강경파 6인을 귀양 보내는 한편 소론 중진들을 대거 조정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영조는 소론을 내쫓은 자리에 노론계 대신 민진원과 정호를 비롯해 예전에 처벌받은 사람들을 다 불러들여 채웠다. 이렇듯 소론에 대한 정치 탄압을 계기로 노론은 영조 즉위 초 확실하게 정국 주도권을 장악했다.

▲ 영조 집권의 정통성을 밝혀놓은 책 『천의소감』

그러나 노론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기회를 빌어 경종 때 소론 강경파가 노론의 지도부였던 4대신을 죽였던 것처럼 소론의 지도부를 구성한 5대신의 목숨을 끊어버리려고 했다. 여기에서 소론 5대신이란 이광좌, 유봉휘, 조태구, 조태억, 최석항 등이다.

노론은 경종 때 이들 5대신이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에 반대했다는 죄를 물어서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영조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은 모두 소론 온건파로 비록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에는 반대했지만 소론 강경파가 자신을 왕세제에서 내쫓으려고 할 때 적극 보호해준 충신들이기도 했다. 노론에게 정치적 빚이 있듯이 소론 온건파에게도 영조는 마음의 빚이 있었다.

그러나 역적을 토벌하라는 노론의 거센 압력 앞에서 영조는 유봉휘를 귀양 보내고 이광좌와 조태억의 관작을 삭탈하는 것으로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다. 심지어 영조는 노론의 신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서 붕당을 깨고 탕평을 이루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노론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데 1727년(영조 3년) 4월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당시 소론 5대신 중 유봉휘가 유배지에서 사망하자 삼사(三司)에 포진한 노론계 언관들이 그 죄를 더욱 가혹하게 물어서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까지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아울러 귀양 가 있는 이진유, 박필몽 등 소론 강경파 다섯 사람을 참수하라고 청했다.

이로 인해 다시 당쟁이 격화되고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영조는 더 이상 노론의 전횡과 독주를 지켜보고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대로 노론에게 끌려 다닌다면 평생 노론의 위세에 눌려 지내는 무능한 임금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조는 부왕(父王) 숙종이 즐겨 사용한 ‘환국정치의 계산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영조는 삼사(三司)의 언관들을 모두 삭탈관직해 내쫓으면서 민진원을 비롯한 노론 대신들까지 모조리 파면해버렸다.

그리고 소론 온건파의 영수인 이광좌와 조태억을 다시 기용해 정승으로 삼고 노론을 내쫓은 자리에 소론을 불러 들였다. 정권이 다시 소론에게 넘어오는 순간이었다. 이것을 ‘정미환국(丁未換局)’이라고 한다.

영조는 즉위 초 입으로는 탕평을 부르짖었지만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정국 운영은 여러 당파의 인사들을 두루 공평하게 등용하는 탕평정치보다는 노론이 집권하면 소론을 쫓아내고, 소론이 집권하면 다시 노론이 쫓겨나는 식의 환국정치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영조 즉위 4년째인 1728년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 세력이 연합해 일으킨 ‘이인좌의 난’은 영조의 이러한 정국 구상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이인좌의 난은 영조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가장 아픈 콤플렉스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인좌 세력이 무장 봉기한 직접적인 이유를 ‘경종을 독살한 영조와 노론의 응징’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인좌의 난 당시 집권당은 정미환국으로 조정에 돌아온 소론이었다. 소론이 집권하고 있는데 소론인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킨 형국이었다.

어떻게 이러한 상황이 벌어졌을까? 영조가 조정에 참여시킨 세력은 소론의 온건파였다. 이들은 비록 영조에 대해 경종 독살 의혹을 거두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조의 왕위 계승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영조 이외에 경종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정치적 현실’을 인정했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이인좌와 같은 소론 강경파와 남인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에게 영조는 이복형을 독살한 파렴치한이었고 임금의 자리를 찬탈한 역적이었을 뿐이다. 더욱이 영조의 임금 지위를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노론의 임금일 뿐 충심과 의리를 바쳐야 할 자신들의 임금은 아니었다.

초기 이인좌의 난은 청주성을 함락하고 영남 지역을 휩쓰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곧 소론 온건파가 이끄는 관군에 패해 토벌 당하고 만다. 영조 체제의 정통성을 뿌리에서부터 뒤흔들어놓을 수도 있었을 이인좌의 난을 어렵지 않게 평정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오로지 당시 집권 세력이 소론 온건파였기 때문이다.

이인좌의 난을 둘러싸고 이미 소론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인좌 등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 세력의 연합은 고립당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노론이 집권 세력이었다면 소론과 남인은 물론 민심의 흐름 또한 어떻게 흘렀을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일이었다. 영조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미환국 이후 소론 온건파에게 정권을 내준 노론은 이인좌의 난을 다시없는 호기(好機)로 여겼다.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후 노론은 소론을 향한 공격의 고삐를 바짝 당겼다.

만약 영조가 보통의 군주였다면 자신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 한 것을 다시 들추어낸 소론과 남인에 대한 정치 보복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영조는 오히려 자신의 과거사 콤플렉스에 대한 해결책을 열린 마음, 곧 자신을 지지하든 반대하든 상관하지 않고 두루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에서 찾았다.

영조는 여러 차례 “당쟁(黨爭)이 역변(逆變: 이인좌의 난)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앞으로 당론을 하는 자는 역모 죄로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또한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지 1년이 지난 1729년(영조 5년) 8월 “당습(黨習)을 조정하려면 탕평 이외에 다른 계책이 없다”면서 소론과 노론을 함께 기용한 ‘기유처분(己酉處分)’을 내렸다. 바야흐로 ‘환국정치’가 끝나고 ‘탕평정치’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비록 영조가 노론 당적을 갖고 있던 임금이었지만 정치적 위기 때마다 자신을 도와주거나 구제해준 세력이 또한 소론(온건파)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영조의 ‘탕평책’은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 노선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이때부터 1755년(영조 31년) ‘나주 벽서 사건’이 발생한 다음 영조가 다시 노론의 일당 독재로 회귀할 때까지 25여년 동안 조선은 ‘탕평정국’을 맞게 된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