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 김정희④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을 스승으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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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④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을 스승으로 삼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11.10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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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㉑
▲ 완원 초상화

[한정주=역사평론가] 앞서 소개한 책에서 최준호씨는 “흔히 말하길 사람은 그 이름이나 명호의 의미대로 산다고 한다”고 밝히면서 김정희의 삶은 “추사의 의미를 따라 살았다”고 했다. 김정희를 대표할 호는 ‘추사’라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그는 김정희의 명호를 총 정리한 책의 제목을 『추사, 명호처럼 살다』라고 붙였다.

반면 유홍준 교수는 김정희의 삶과 학문을 대표할 호는 추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김정희의 삶과 학문을 총체적으로 조명한 평전의 제목을 『완당평전』이라고 붙였다.

그렇다면 김정희는 언제부터, 또 어떻게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쓰게 되었던 것일까?

김정희의 삶과 철학, 학문과 예술 세계에서 가장 분수령이 되는 시기는 24세가 되는 1809년(순조 6년)에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私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에 다녀온 때다.

청나라에 가기 이전 모든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천재적 기질을 보였던 김정희가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바로 북학파의 두뇌나 다름없던 초정 박제가였다. 박제가만한 포부와 학식과 경륜을 갖춘 대학자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자존심과 자부심이 남달랐던 천재 김정희를 가르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때문에 불행하게도 1805년 나이 20세 때 스승 박제가가 갑자기 사망하자 김정희는 나라 안에서 가르침을 받을 만한 스승을 결코 만날 수 없었다.

어쨌든 김정희는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신 덕분에 일찍부터 북학에 뜻을 두고 학문을 익히고 지식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청나라의 학계와 문예계에 관한 소식과 주요 학자와 문사들에 관한 정보를 자주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박제가가 세상을 떠난 후 오직 연경에 가서 예전에 스승과 교류했던 청나라의 대학자들을 직접 만나 교제를 맺고 가르침을 받겠다는 소망을 간직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다시피 했다. 그러한 소망을 실현할 기회가 스승 박제가가 사망한 지 4년이 지난 1809년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그 해 10월28일 한양을 떠난 김정희가 연경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만났던 사람은 스승 박제가가 세 번째 연행(燕行) 때 사귄 조강(曹江)이라는 상해 출신의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이 조강을 통해 서송(徐松)이라는 학자를 소개받았고, 다시 서송을 통해 당대 최고의 대학자였던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게 된다.

옹방강과 완원, 이 두 사람과의 만남은 앞서 언급했듯이 김정희의 삶과 학문 및 예술에서 중대한 분수령이 되었다. 김정희 연구의 권위자인 일본인 동양철학자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는 이들의 만남이 19세기 조선의 지성사에서 차지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이렇게 평가했다.

“특히 박제가의 제자로 조선 500년 역사상 보기 드문 영재(英材) 완당 김정희가 출현하여 연경에 가서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 두 경사(經師)를 알게 되고, 여러 명현들과 왕래하여 청조 학문의 핵심을 잡아 귀국하자 조선의 학계는 실사구시의 학문으로 빠른 진전을 보여 500년 내로 보지 못했던 진전을 보게 되었다.”(유홍준 저, 『알기 쉽게 간추린 완당평전 김정희』, 학고재, 2006. P43에서 재인용)

김정희 이전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활약상을 감안해보면 약간 지나치다고밖에 볼 수 없는 미화와 찬사지만 어쨌든 후지츠카가 내린 결론대로 김정희는 옹방강과 완원을 만난 이후 지속된 교류를 통해 명실상부 ‘청조학(淸朝學) 연구의 제일인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김정희와 옹방강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글로 주고받은 ‘필담서’. <추사박물관 소장>

옹방강과 완원 중 김정희가 먼저 찾아가 만난 사람은 당시 47세의 나이로 청조학(淸朝學)이라 일컫는 청나라의 학술계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던 대학자 완원이었다. 연경에 도착한 후 해를 넘긴 김정희는 1810년 1월 태화쌍비지관(太華雙碑之館)으로 완원을 찾아가 사제(師弟)의 도의를 맺었다.

김정희를 만난 완원은 비록 자신보다 22년이나 연하였지만 김정희가 천재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는데다가 이미 높은 학문적 수준에 도달해있다는 사실을 엿보고 크게 놀라는 한편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편찬의 책임자로 참여해 각 권마다 서문까지 썼을 만큼 정성을 기울인 『13경주소교감기(十三經注疏校勘記)』 한 질을 선물로 주었다.

모두 24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방대한 규모의 서적은 유학의 13경(十三經)에 대해-한(漢)나라에서부터 명(明)나라에 이르기까지-역대 학자들의 저술을 총 정리하고 종합해 놓은 경전 연구의 최고 대작(大作)이었다.

그밖에도 완원은 청조학, 즉 고증학과 금석학의 수많은 이론과 학설을 전해 주었는데, 김정희는 그것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겨 조선으로 돌아온 후 평생 학문의 지침서로 삼았다고 한다.

완당(阮堂)이라는 호 역시 이때 김정희가 완원과 맺은 사제의 인연으로 탄생했다. 완원(阮元)에서 ‘완(阮)’자를 따와 김정희가 마침내 자신의 당호를 ‘완당’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완당이라는 호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는 크게 이론이 없지만, 이 호가 완원이 김정희에게 주어 사제의 인증을 확실히 하였다는 주장과 함께 김정희의 자작(自作)이라는 의견 역시 제기되고 있다.

여하튼 완원의 이름에서 따와 자신의 호를 삼았을 정도로 김정희의 삶과 철학, 학문과 예술 세계에서 완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첫 번째 스승 박제가와의 인연은 15세 무렵부터 20세까지 불과 5년 정도였던데 반해 완원과의 교류는 이때부터 완원이 사망한 1849년까지 무려 40여 년 가까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 옹방강 초상화

김정희가 당시 연경에서 만났던 또 한 명의 스승인 옹방강은 이미 나이가 많아 1818년 사망했기 때문에 완원이 김정희의 삶과 학문에 끼친 영향력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완원을 만나 배움의 기쁨을 한껏 만끽했던 김정희는 그 흥분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인 1월 29일 청나라의 원로학자인 옹방강을 찾아가 또한 사제의 도의를 맺었다. 당시 나이 78세였던 옹방강은 명실상부 청나라 학계를 대표하는 원로학자였다.

특히 옹방강은 고서화와 희귀 금석문(탁본)과 전적 수집에 남다른 관심과 탁월한 수완을 보여 ‘석묵서루(石墨書樓)’라고 이름 붙인 자신의 서고에 무려 8만 점에 달하는 수장품을 보관하고 이를 학문 연구의 자료로 활용했다고 한다.

옹방강은 김정희에게 이 서고를 마음껏 둘러보도록 허락했고 김정희는 조선에서는 평생 구경할 수 없는 진귀한 서적과 금석학의 자료들을 직접 보고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완원이 그랬던 것처럼 옹방강 역시 김정희에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여러 서적과 서화는 물론 귀중한 금석문의 탁본까지 선물로 주었다.

더욱이 완원과의 만남에서 ‘완당’이라는 호를 얻었던 것처럼 김정희는 옹방강과의 만남을 통해 ‘보담재(寶覃齋)’라는 호를 얻었다. 즉 소동파를 흠모했던 옹방강이 자신의 서재 이름을 ‘소동파를 보배롭게 여기는 서재’라는 의미로 ‘보소재(寶蘇齋)’라고 한 뜻을 좇아 김정희는 ‘담계(覃溪) 옹방강을 보배롭게 여기고 받드는 서재’라는 뜻으로 자신의 서재 이름을 ‘보담재(寶覃齋)’라고 하고 또 하나의 자호(自號)로 사용했다.

이 ‘보담재’라는 호는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추사나 완당과 더불어 김정희를 대표하는 또 다른 호로 크게 대접받았다.

심지어 최준호씨는 “사실 추사가 중국 북경에 갈 때까지 사용한 명호는 이름과 자를 제외하곤 한 두 개가 고작이었는데 중국 연경에서 보담주인(寶覃主人)이란 명호를 새롭게 얻게 되었다. 이는 추사가 귀국한 후 보담재주인, 보담재, 보담재인 등의 명호를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바야흐로 명호 보담주인으로부터 추사의 명호벽(名號癖)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추사의 명호는 전 세계에서 으뜸이자 온갖 호화찬란한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최준호 저, 『추사, 명호처럼 살다』, 아미재, 2012. P121)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평생 수백 개의 호를 사용한 김정희의 이른바 명호벽(名號癖), 즉 명호에 대한 애정과 집착(?)은 ‘담계 옹방강을 보배롭게 여기고 섬긴다’는 뜻의 보담(寶覃)의 작호(作號)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김정희의 명호 인생에서 보담재가 차지하는 비중이-추사나 완당 못지않게-그만큼 컸다는 얘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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