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하실 유금과 『한객건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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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실 유금과 『한객건연집』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20.05.04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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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⑭ 운룡산인 이조원의 생일에 탄소 유금을 위하여

만 리 머나먼 면주 마치 이웃인 양           綿州萬里看比隣
마음으로 사귄 뒤 정의(情意) 점점 깊어가네 自定神交意轉眞
해마다 섣달 초닷새 돌아오면                歲歲餘冬初五屆
멀리 술잔 보내 생신 축하하네               遙飛一盞賀生辰
『아정유고 3』 (재번역)

탄소 유금의 기하실(幾何室)에 붙이다

고라니 눈동자처럼 뚫어진 울타리, 그림자 비추는데 麂眼疏籬影斜
숫벌은 미친듯 나물 꽃 희롱하네                    雄蜂狂嬲菁花
한가로이 향료 침속을 품평하고                     閒評香品沈速
시험 삼아 다명 개라를 찾아보네                    試拈茶名岕羅
조선이라 어찌 답답하다 탄식하랴                   東國寧歎鬱鬱
중원에는 그대 이야기 풍성하다오                   中原滿說津津
그대의 말 모두 어젯밤 꿈같은데                    子語渾如昨夢
내 마음 완연히 전생의 몸이네                      吾心宛是前身
『아정유고 3』(재번역한 것임)

[한정주=역사평론가] 이덕무를 비롯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를 가리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한시 4가’라고 부른다.

이덕무 등이 ‘한시 4가’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게 되는데 일등 공신의 역할을 한 사람은 유득공의 숙부 유금이다.

백탑파의 일원인 유금은 1775년 무렵 이 네 사람의 시문을 가려 뽑아 시 선집을 엮었다. 1년 후 청나라 사신단에 참여하게 된 유금은 이 시 선집을 들고 가서 무작정 당시 청나라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문장가인 이조원과 반정균을 찾아갔다.

당시 이조원과 반정균이 꼼꼼하게 읽어본 다음 정밀하게 비평해준 시는 이덕무 99수, 박제가 100수, 유득공 100수, 이서구 100수 등 총 399수였다. 특히 이조원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비평가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네 사람의 시에 대해 이러한 평을 남겼다.

“사가(四家)의 시를 보면 그 재주가 심중하고 웅장하며, 절조는 맑고 우렁차고, 기상은 크고 넓다.”

또한 반정균은 네 사람의 시는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시와도 다른 새로운 시의 경지를 개척했다고 극찬했다.

유금이 조선으로 돌아온 후 이 소식은 도성 안에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당시 이덕무는 서른여섯, 유득공은 스물아홉, 박제가는 스물일곱, 이서구는 스물셋의 나이였다.

특히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은 1779년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면서 비로소 이름을 얻기 시작했으니 이때는 알아주는 이 찾기 힘든 이름 없는 재야의 선비에 불과했다.

조선에서도 미처 알아보지 못한 이들의 시재(詩才)를 만 리나 떨어진 중국의 지식인은 알아보았던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중국의 지식인은 아무런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 없이 오로지 이들의 시재(詩才)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는 ‘한시 4가’라는 명성을 누렸다.

이들에게 영예와 명성을 안겨준 시집의 제목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다. ‘삼한(三韓)의 손님이 보자기에 싸온 시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렇게 보면 유금은 이덕무의 시재를 중국에 소개해 큰 명성을 안겨 준 은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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