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해 마음 내키는 대로 박제가에게 써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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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해 마음 내키는 대로 박제가에게 써주다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20.05.11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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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⑮ 나의 절친 박제가
청나라 화가 나방이 그린 박제가. [추사박물관 소장]
청나라 화가 나방이 그린 박제가. [추사박물관 소장]

산수로 벗 삼고 천성과 천명 삼으니       山水友朋性命之
그런 뒤에야 참된 남아(男兒)라 이를지라  夫然後謂善男兒
평생 한 번 보아도 인연이라 하는데       平生一見緣猶在
하루걸러 상봉하니 인연 알만 하네         間日相逢契可知
옛사람에게서 구해도 몇 명이나 되겠는가  於古也求凡幾輩
가을 기운 느껴지는 사람 다시 누구인가   似秋而感更伊誰
아! 나는 본래 기인일 따름이다            嗟乎僕本畸人耳
그 마음 알고 싶거든 눈썹 먼저 살펴보게  欲會其心願察眉
『아정유고 2』 (재번역)

일찍이 박제가가 내게 다음과 같은 시를 써주었다.

문 닫아 걸은 채 삼십 년 동안           閉門三十載
옷에 먼지 쌓이는 줄 알지 못했네       衣麈集不知
책 속에 세계 있어                      書中有世界
외로이 웃고 문득 눈썹 펴네             孤笑忽伸眉
높고 귀한 얼굴빛 고상한 성품에 걸맞고 繁華配高性
글재주 곧은 자태와 일치하네            文藻合貞姿
옛 현자(賢者) 명예 절개 두려워         前修愼名節
어릴 때부터 평생 굶주림 견디네         少忍百年飢
나 역시 서로 알아주는 깊은 마음에 감동하였다. 박제가의 시문은 이치가 명백하다는 평은 결코 허언(虛言)이 아니다.”
『청비록 4』 (재번역)

[한정주=역사평론가] 이덕무는 박제가보다 9살이나 많다. 하지만 박제가는 이덕무의 절친이었다. 특히 두 사람은 ‘백탑시사(白塔詩社)’ 또는 ‘백탑파(白塔派)’라고 불리는 시문학동인을 주도하다시피 했다. 그 까닭은 시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덕무는 일찍이 박제가의 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박제가의 시는 깨끗하고 산뜻할뿐더러 맑고 상쾌하여 그 사람됨과 같다. 내가 예전에 ‘시대에 따라 각기 시가 다르고 사람에 따라 각기 시가 다르다. 따라서 옛사람과 다른 사람의 시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 답습한 시는 군더더기 시일뿐이다’라고 하였다. 박제가는 일찌감치 이러한 시의 도리를 깨우쳤다.”

또한 박제가는 이덕무의 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입술만 쳐다보며 진부하고 상투적인 글에서 그림자와 울림이나 주워 모으는 것은 시의 본색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는 일일 뿐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시인데, 왜 다른 사람의 시를 모방하고 답습한단 말인가? 어리석은 사람은 살피지 못하나 지혜로운 사람은 알고 있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이렇듯 옛사람과 다른 사람의 시를 모방하거나 답습하는 일을 가장 꺼렸다. 이 때문에 ‘기궤첨신’이라는 시평에 담겨 있는 것처럼 새롭고 독자적인 시의 경지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구 중에서도 최고의 친구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다. 우정의 최고 경지를 뜻하는 지음(知音), 지기(知己), 동심우(同心友)라는 말은 모두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 이 시에서 이덕무는 박제가의 겉모습만 봐도 그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먼저 ‘눈썹’을 살펴보라고 했다. 실제 박제가는 남다른 눈썹을 지니고 있었던 모양이다. 재미있게도 박제가가 직접 쓴 ‘소전(小傳)’이라는 글에 보면 자신의 외모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소 같은 이마와 칼 같은 눈썹에 초록빛 눈동자와 하얀 귀를 갖추었다.”

칼 같은 눈썹에 나타난 박제가의 내면은 무엇일까? 이덕무는 『청비록』에서 박제가의 성정에 대해 “기운이 강하고 사리가 명백하고 기상이 장렬하고 말과 생각이 기이하고 웅장하다”고 평한 적이 있다.

칼 같은 눈썹과 강한 기운, 명백한 사리, 장렬한 기상, 기이한 말, 웅장한 생각은 묘하게 그 이미지가 일치하지 않은가?

박제가의 마음을 알고 싶다면 먼저 그 눈썹을 보라는 이덕무의 말에 쉽게 공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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