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처(嬰處)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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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처(嬰處)의 미학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20.06.15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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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㉓ 하늘을 노래하다

산뜻함과 맑음 하늘의 기색이라                     至氣輕淸本有儀
형체 높고 넓어 끝없지만 듣고 보는 건 나직하네    形高浩蕩俯臨卑
바람·구름·천둥·비 내키는 대로 흘러 다니고     風雲雷雨能行布
해·달·별 스스로 굴러 옮겨 다니네               日月星辰自轉移
백성 덮어 길러주니 공적 헤아리기 어렵고          覆育群生功莫測
만물 길러 성장하니 이치 넓고 멀어 끝이 없네      養成萬物理無涯
뉘라서 자연 조화 터득하지                         渾全造化其誰料
저 맑고 푸른 하늘에 한 번 묻고 싶네              我欲蒼蒼一問之
『영처시고 1』(재번역)

[한정주=역사평론가] 『영처시고(嬰處詩稿)』의 첫머리에 나오는 시다. 『영처시고』는 이덕무가 나이 20세 때 자신의 시를 모아 책으로 엮은 생애 최초의 시집이다.

조선의 선비들 중 호(號)를 많이 사용한 사람을 꼽으라면 1등은 추사 김정희이고, 2등은 다산 정약용이고, 3등은 이덕무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이덕무는 생전에 수십 개의 호를 사용하며 자신을 드러냈다.

영처(嬰處)는 이덕무가 10대 시절 사용한 호다. 『영처시고』라는 시집 제목은 이 호에서 비롯되었다.

영(嬰)은 어린아이를 뜻하고, 처(處)는 처녀를 뜻한다. 어린아이와 처녀? 호치고는 좀 이상한 호다.

이덕무는 왜 영처라는 호를 사용했을까? 또한 생애 최초의 시집에 『영처시고』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글쓰기, 즉 시문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미학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이덕무는 『영처시고』에 스스로 서문을 붙여 이렇게 말했다.

“글을 짓는 것이 어찌 어린아이가 장난치며 즐기는 것과 다르겠는가? 글을 짓는 사람은 마땅히 처녀처럼 부끄러워하며 자신을 감출 줄 알아야 한다. 어린아이가 장난치며 즐기는 것은 ‘천진’ 그대로이며, 처녀가 부끄러워 감추는 것은 ‘순수한 진정’ 그대로인데, 이것이 어찌 힘쓴다고 되는 것이겠는가?”

‘장난치며 즐기는 것’과 같은 어린아이의 천진한 마음, 부끄러워 감추는 것과 같은 처녀의 순수한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얘기다. 가식이나 인위가 아닌 진정(眞情)과 진심(眞心)을 글쓰기의 동력이자 원천으로 삼으라는 얘기다.

자신의 감정, 마음, 뜻, 기운, 생각을 가식적으로 꾸미거나 인위적으로 다듬지 않고 진실하고 솔직하게 드러내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이덕무가 추구한 시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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