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날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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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날 밤에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20.07.16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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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㉛ 풍속화와 풍속시

집집마다 다리 근처로 나가                 家家橋畔出
한산주가 온통 시끌벅적하네                闐咽漢山州
대지에는 봄기운이 막 감돌고               大地春初到
중천에는 달이 환하게 흐르네               中天月正流
마음에는 쓸쓸히 옛 시 떠오르고            藏心空舊詠
머리 들어 바라보니 시름뿐                 矯首只間愁
함께 걸었던 옥하로에서                    聯袂玉河路
누구와 더불어 노니는지 알 수 없네         不知誰共遊
『아정유고 3』 (재번역)

[한정주=역사평론가] 시를 쓰듯이 산문을 쓰고 산문을 쓰듯이 시를 썼던 것처럼 이덕무는 그림을 그리듯 시를 쓰고 시를 쓰듯 그림을 그렸다.

이 같은 이덕무의 미학은 『선귤당농소』에 나오는 “그림을 그리면서 시의 뜻을 알지 못하면 색이 어둡거나 메말라 조화를 잃게 되고, 시를 지으면서 그림의 뜻을 알지 못하면 시의 맥락이 잠기거나 막히게 된다”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8세기 전반기 조선의 문화예술을 주름잡았던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후반기로 들어서면서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로 변화 발전했다.

진경산수화는 ‘조선적인 것’, 즉 조선의 고유한 색과 멋을 표현하고 묘사하는 데서 출발했다. 전반기의 진경산수화가 후반기의 풍속화로 변화 발전한 이유 역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처음 조선의 자연 산천에서 ‘조선적인 것’을 찾았던 흐름이 점차 사람들이 살아가는 실제 모습, 즉 풍속과 문화에서 ‘조선적인 것’을 찾는 흐름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8세기는 ‘조선적인 것’, 곧 조선 고유의 풍속과 문화를 발견 혹은 재발견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덕무의 시작(詩作)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덕무는 앞서 박지원이 그의 시를 가리켜 ‘조선의 국풍’이라고 말한 것처럼 조선 고유의 풍속과 문화를 시로 표현하고 묘사하는 시대의 흐름을 누구보다 앞서 주도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진경시가 나타났던 것처럼 이덕무의 풍속시는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세기 한양 도성 안에는 정월 대보름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거리로 몰려나와 대광통교와 소광통교 그리고 수표교 등 청계천 다리를 밟고 다니는 답교(踏橋) 풍속이 있었다. 그렇게 하면 다리 병이 낫고 또한 1년 동안 다리 병을 앓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월 대보름날 밤에’는 18세기 한양의 답교 풍속을 잘 묘사한 이덕무의 대표적인 풍속시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를 통해 18세기 한양 사람들의 삶의 풍경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덕무의 시를 통해서도 그 삶의 풍경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 시대 풍속화와 풍속시의 조우는 시와 그림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했던 이덕무의 시학(詩學)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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