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 김정희⑤ 삶과 학문·예술세계 대변하는 호 ‘완당(阮堂)’
상태바
추사(秋史) 김정희⑤ 삶과 학문·예술세계 대변하는 호 ‘완당(阮堂)’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11.21 08: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㉑
▲ 세한도(歲寒圖), 세로 23㎝×가로 69.2㎝, 국보 제180호, <손창근 소장>

[한정주=역사평론가] 이렇듯 청조학의 일인자이자 최고 권위자였던 완원과 옹방강을 만나 평생에 두 번 다시 얻기 힘든 소중한 인연을 맺고 조선으로 돌아온 김정희는 이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학문과 예술의 경지를 성취할 수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김정희는 훗날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시절 자신의 초상에 붙인 글에서 옹방강과 완원과 자신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기까지 했다.

“담계 옹방강은 ‘옛 경전을 탐닉한다’고 말했고, 운대(雲臺) 완원은 ‘다른 사람이 그렇다고 말하더라도 나 역시 그렇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 두 분의 말씀을 좇아 나의 평생을 다 바쳤다.” 『완당전집』, ‘또한 소조(小照)에 스스로 붙여(自題小照又)’

그래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유홍준 교수는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이제 김정희는 ‘추사에서 완당’으로 탈바꿈했다고 하면서 “30대로 들어서면 김정희의 호는 추사보다도 완당으로 더 널리 불리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30대 이후 김정희가 완원의 청조학을 익히고 연구해 가히 ‘청조학의 제일인자’로 거듭났기 때문에 ‘완당’이라는 호에서 그의 정체성과 진면목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희의 여러 기록과 서화 작품들을 살펴보더라도 그가 ‘추사’라는 호보다는 ‘완당’이라는 호를 더 애호(愛好)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정희가 완당이라는 호를 얼마나 아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가 다름 아닌 ‘세한도(歲寒圖)’다.

김정희의 고고한 기상과 정신세계를 집약해놓았다고 평가받는 ‘세한도’는 그의 생애 최고 걸작품이었다.

제주도에 유배온 지 5년째 되는 1844년 김정희의 나이 59세 때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화제(畵題)를 써준 ‘세한도’는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오른 대학자이자 예술가였던 김정희의 학문 세계와 예술의 미학을 가감 없이 들여다볼 수 있는 명작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김정희는 수많은 호를 제쳐두고 ‘완당’ 혹은 ‘완당노인’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먼저 그림의 제목에 해당하는 화제(畵題)에서 김정희는 ‘歲寒圖 蕅船是賞 阮堂(세한도. 우선시상. 완당)’이라고 썼다. 이 화제를 풀이하면 ‘세한도. 우선(蕅船) 이 그림을 감상해보게. 완당’이라는 뜻이다.

이상적은 호(號)가 우선(藕船)인데 김정희는 이를 우선(蕅船)이라 바꿔 쓴 것이다. 그림의 제목에 ‘완당’이라고 쓰고 낙관을 찍은 김정희는 그림에 붙이는 글, 즉 ‘발문(跋文)’에서는 ‘완당노인’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지난해에 『만학(晩學)』과 『대운(大雲)』 두 책을 보내주고 올해에는 우경(藕畊)의 『문편(文編)』을 보내오니, 이러한 일은 모두 세상에서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천만 리 머나먼 곳에서 구입해오고,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서 얻은 것으로 일시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세상은 도도히 흐르는 물결처럼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좇아 따라가서 마음을 기울이고 공력을 쏟아 붓는 것이 상례인데 권세와 이익에 붙지 않고 바다 밖에 있는 초췌하고 메마른 나 같은 사람에게 돌아왔도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서로 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 역시 세상의 도도한 흐름 가운데 있는 한 사람인데 도도히 권세와 이익의 바깥에서 초연히 스스로 분발하니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보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공자가 말하기를 ‘날이 차가워진(歲寒)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는 것이니 날이 차가워지기(歲寒) 이전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이고 날이 차가워진(歲寒) 다음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이다.

그러나 특별히 성인(聖人)은 날이 차가워진(歲寒) 다음을 칭찬하였는데,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이 이전이라고 해서 더한 것이 없고 이후라고 해서 덜한 것이 없다. 이전에 나를 대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대를 칭찬할만한 것은 없다고 해도 이후로 나를 대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대는 성인이 칭찬한 것으로 역시 칭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단지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 시드는 것이 아니라 정조(貞操)과 굴하지 않는 절개에 있을 뿐이다. 아! 쓸쓸하고 슬픈 이 마음이여!! 완당노인(阮堂老人)이 쓰다.”

세한도를 그릴 당시 김정희는 비록 유배객의 불운한 신세였지만 이미 조선과 청나라 두 나라에서 ‘최고의 청조학자(淸朝學者)이자 서화가(書畵家)’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59세였던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은 완숙의 수준을 넘어서 어느 누구도 넘겨볼 수 없는 독보적인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이 때문에 이상적이 스승이 그려준 ‘세한도’를 가지고 청나라를 방문해 그곳의 이름 높은 학자와 문사들에게 보여주자 아낌없는 환호와 찬사가 쏟아졌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던지 무려 16명이 앞 다투어 ‘세한도’에 제찬(題贊)을 썼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당시 김정희의 국제적 명성과 권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김정희가 일생의 명작으로 남긴 세한도에 완당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그렇게 한 뜻이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어떤 호보다 자신의 삶과 학문 및 예술 세계를 대변해주는 호가 다름 아닌 완당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표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김정희의 생애 전체를 살펴볼 때 추사라는 호보다는 완당이라는 호가 그의 뜻과 철학에 더 부합하지 않나 하는 결론을 조심스럽게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일반 사람들에게 익숙한 호는 ‘추사’지만 김정희를 대변하고 대표하는 호는 ‘완당’이 더 합당하다는 얘기다. 따라서 ‘추사인가 아니면 완당인가’라는 호 대결(?)은 ‘완당’의 판정승이라고 하겠다.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