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동심(童心)
상태바
거울과 동심(童心)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0.08.31 08: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덕무 詩의 온도]㊷ 거울에 붙여(題鏡匣)
윤덕희, '공기놀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덕희, '공기놀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맑기는 가을 강 물결을 담은 듯한데              淨似秋江斂水痕
경갑 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감춰져 있구나       匣中藏得別乾坤
투명하고 청결하여라, 한갓 구경거리 아니니      涵虛淸潔非徒翫
내 마음도 거울 닮아 어두워지지 않았으면        但慕吾心不自昏
『영처시고 1』 (재번역)

봄날 아이들 장난

김씨 동산 하얀 흙담                            金氏東園白土墻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나란히 줄 이루었네        甲桃乙杏倂成行
버들피리 복어 껍질 북                          柳皮觱栗河豚鼓
어깨 연이은 아이들 나비 잡기 바쁘네           聯臂小兒獵蝶忙
『영처시고 2』

[한정주=고전연구가] 이덕무는 평생 동심의 삶과 글을 추구했다. ‘동심의 철학자’ 이탁오는 이렇게 말한다.

“동심이란 어린아이의 마음이다. 동심이란 진실한 마음을 말한다. 어린아이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최초의 모습이며, 동심이란 사람이 처음 지니게 되는 마음의 최초 모습이다. 최초로 지니게 된 마음을 어찌 잃어버릴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사람들은 갑자기 동심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일까. 모름지기 그 시작은 듣고 보는 것이 눈과 귀로 들어와 사람의 마음속에서 주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동심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자라면서 도리가 눈과 귀로 따라 들어와 사람의 마음을 주재하게 되면 역시 동심을 잃고 만다. 어른이 되어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더욱 많이 쌓이고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이 나날이 더욱 넓어지게 되면 명성이 알려지고 명예가 높아지는 것을 좋아하게 되어 마침내 명예와 명성을 드날리려고 힘을 쏟다가 동심을 잃어버리게 된다.

또한 나쁜 평판과 불명예가 추하다고 여겨서 그것을 애써 감추려고 애를 쓰다 동심을 잃고 마는 것이다. 만약 동심을 간직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마음이 없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저 동심이란 거짓을 끊어버린 순수함과 진실함으로 사람이 갖게 되는 최초의 본심(本心)이다. 만약 동심을 잃어버리면 다시 진실한 마음을 잃게 되고 진실한 마음을 잃어버리면 다시 진실한 인간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사람이라도 진실하지 않다면 최초의 본심을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

사람이 본래 지니고 있는 최초의 마음인 동심을 잃지 않아야 진실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다. 도리와 견문에 가려서 동심을 잃게 되면 참된 감정을 거짓으로 다듬고 진실한 마음을 인위적으로 꾸미는 짓을 아무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동심을 잃은 사람이 지은 글은 거짓 글이자 가짜 글이요 죽은 글이다. 참된 감정과 진실한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동심을 간직한 사람이 지은 글은 참된 글이자 진짜 글이요 살아 있는 글이다. 참된 감정과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탁오는 “천하의 명문(名文)은 모두 동심에서 나왔다!”고 선언하였다.

“천하의 지극한 문장은 동심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만약 사람이 항상 동심을 보존할 수만 있다면 도리가 행해지지 않고 견문이 행세하지 못하게 되므로 아무 때나 글을 지어도 훌륭한 문장이 되고, 아무나 글을 지어도 훌륭한 문장이 되고, 어떤 양식과 문체와 격식과 문자를 창제(創制)한다고 해도 훌륭한 문장이 아닌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이덕무에게 동심의 삶과 글이란 천진하고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을 바탕 삼아 삶을 살고 글을 쓴다는 의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특히 이덕무는 동심을 자주 거울에 빗대어 표현했다. 맑고 깨끗한 거울의 순수함과 진실함이 동심과 꼭 닮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덕무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시는 물론 산문으로도 남겼다. 여기 이 시와 짝할 만한 산문이 『선귤당농소』에 남아 있다.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고 웃는 것은 뒤쪽까지 환히 트인 줄 알기 때문이다. 서둘러 거울 뒤쪽을 보지만 단지 까맣고 어두울 뿐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그저 빙긋이 웃을 뿐 왜 까맣고 어두운 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기묘하다. 거리낌이 없어서 막힘도 없구나!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무엇에도 막히지 않아야 참된 감정과 진실한 마음을 드러낼 수 있다. 거리낌과 막힘이 있는데 어떻게 참된 감정과 진실한 마음이 드러날 수 있겠는가? 글을 쓸 때 경계해야 할 최대의 적은 ‘자기 검열’이다. 거리낌과 막힘이 자기 검열이 아니면 무엇이 자기 검열이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동심을 잃지 않으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쓸 수 있을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 한 편 있다. 시인 안도현의 ‘동심론’이라는 글에 나오는 시인 백창우의 ‘니 맘대로 써’라는 제목의 동시(童詩)다.

“니가 쓰고 싶은걸 / 니 맘대로 써 / 니 말로 말야 / 니만 좋으면 돼 / 시 쓰면서 눈치 볼래면 / 뭐하러 시를 써 / 세상에 시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 니가 아무리 잘 써봐 / 그래도 다 맘에 들어 하진 않아 / 그냥 니 맘에 들면 돼/ 니 맘에도 안 든다고?/ 그럼, 버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