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白沙) 이항복③ 필운(弼雲)…경복궁을 보필하는 산(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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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白沙) 이항복③ 필운(弼雲)…경복궁을 보필하는 산(山)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12.16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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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㉒
▲ 겸재 정선의 필운대(弼雲臺). <간송미술관 소장>

[한정주=역사평론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항복은 말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백사(白沙)’라는 호를 얻어 사용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이항복하면 자연스럽게 ‘백사(白沙)’라는 호를 떠올리지만 사실 그가 이 호를 사용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항복 생전에 사람들이 즐겨 불렀던 그의 호(號)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살았던 인왕산(仁王山) 필운대(弼雲臺)에서 취한 ‘필운(弼雲)’이었다.

이항복은 1556년 한양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에서 태어났다. 이항복의 집은 인왕산 필운대 아래에 있었는데 오늘날 종로구 필운동 88번지 일대로 현재 배화여고가 들어서 있는 자리다.

인왕산은 조선을 건국할 때 태조(太祖) 이성계의 스승이었던 무학대사가 주산(主山)으로 삼아 궁궐과 도성을 세울 생각을 했을 정도로 풍수지리상 길지(吉地)였다. 특히 필운대 일대에 임금이 거처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정궁(正宮)을 세우려고 했다니 이항복이 살던 곳은 길지 중의 길지였던 셈이다.

비록 북악(北岳)을 주산(主山)으로 삼아야 한다는 정도전의 주장에 막혀 인왕산은 주산이 되지 못했지만 오늘날까지 인왕산은 국가 수호의 상징인 토지신과 곡물신을 모시는 사직단(社稷壇)의 소재지이자 서울의 주산인 북악을 보좌하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중 우백호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인왕산은 또한 필운산(弼雲山)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다. 필운산은 조선이 개국한 지 145년 뒤인 1537년(중종 32년)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오희맹(吳希孟)이라는 사람이 ‘우필운룡(右弼雲龍)’, 곧 ‘인왕산이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경복궁)을 오른쪽에서 보필(輔弼)하고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항복이 일찍이 ‘필운(弼雲)’을 자호로 삼았던 이유 역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경복궁을 보필하는 듯한 형세를 취하고 있는 필운산처럼 임금을 보좌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뜻을 ‘필운’이라는 호에 새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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