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객들의 멋과 흥을 전하는 활터…구례 봉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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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객들의 멋과 흥을 전하는 활터…구례 봉덕정
  • 한정곤 기자
  • 승인 2021.04.30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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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⑪ ‘단소 명인’ 백경 김무규의 삶·예술·활쏘기
봉덕정 전경. [사진=안한진]
봉덕정 전경. [사진=안한진]

동편제의 본고장으로 가는 길에서 듣는 음악은 역시 판소리 『적벽가』가 제격이다. 수많은 군대와 장수들이 등장하고 전투하는 사설이 많아 빠른 장단에 웅장하고 씩씩한 호령조를 특징으로 하는 가장 남성적인 판소리로 평가된다.

처음부터 소리로 전해온 『춘향가』나 『심청가』와 달리 소설이 소리로 변화한 『적벽가』는 상대적으로 사설이 복잡하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장엄하고 꿋꿋한 우조(羽調) 위주의 소리이기 때문에 남성 소리꾼을 주축으로 하는 동편제 계열에서 많이 불렀다.

◇ 「조자룡 활쏘는 대목」에 등장하는 집궁제원칙
『적벽가』 중에서도 활꾼이라면 「조자룡 활쏘는 대목」을 빼놓을 수 없다. 오나라 주유는 서성과 정보 두 장수에게 하늘에 동남풍을 빌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제갈공명을 제거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공명은 이를 예상하고 이미 조자룡을 대기시켰다. 따라서 사설은 공명이 안전하게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임무를 부여받은 조자룡이 활을 쏘아 추격해 오는 오나라 두 장수를 물리치는 내용이다.

소이광 화영이 『수호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호걸 가운데 유일한 신궁(神弓)이라면 『삼국지』에서는 단연 상산 조자룡이다. 특히 「조자룡 활쏘는 대목」을 듣다 보면 익숙한 단어들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가는 배 머무르고 오는 배 바라보며 백보 안에가 드듯마듯 장궁철전(長弓鐵箭)을 먹여 비정비팔(非丁非八)허고 흉허복실(胸虛腹實)하야 대두(大頭)를 숙이고 호무뼈 거들며 주먹이 터지게 줌통을 꽉 쥐고 삼지(三指)에 힘을 올려 궁현(弓弦)을 따르르르르 귀밑아씩 정기일발(精氣一發) 깍지손을 딱 떼니 번개같이 빠른 살이 해상으로 피르르르 서성 탄 배 덜컥 돛대 와지끈 물에가풍 오든 배 가로저 물결이 뒤채여 소슬광풍(簫瑟狂風)에 뱃머리 빙빙빙빙빙 돌고 물결은 워리렁 출렁 뒤뚱그려 본국으로 떠나간다.”

신사(新射) 때부터 귀에 닳도록 들어왔던 ‘집궁제원칙(執弓諸原則)’이 실전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조자룡 활쏘는 대목」을 처음 알려준 이는 황학정 안한진 접장이었다. 입사(入射) 채 2년이 되지 않아 1년간 휴궁(休弓)했던 안 접장은 복궁(復弓) 후 첫 삭회(朔會)에서 4연몰기를 시작으로 시수꾼이란 별명을 얻었다. 직장 관계로 휴궁은 했지만 점심시간 상암국궁장을 다니며 습사를 했단다. 이때 안 접장의 교본은 우연찮은 기회에 알게 된 「조자룡 활쏘는 대목」이었다. ‘주먹이 터지게 줌통을 꽉 쥐고 삼지에 힘을 올려’라는 대목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동영상 촬영=안한진>

◇ 민간인 학살의 비극을 품은 봉성산
드론을 챙겨 들고 동행한 안 접장과 당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300km를 달려 땅거미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할 즈음 구례땅으로 들어선다.

완만하게 흘러내리는 산줄기 아래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이 곳곳에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예전 같았으면 아궁이에서 뿜어내는 저녁밥 짓는 연기가 하늘하늘 춤을 추며 오르고 있을 시간이다. 그때보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편리한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데도 모두들 이유 없이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고등학교 땐 천은사로 불교학생회 수련회를, 대학 시절엔 산동면으로 농촌활동을, 졸업 후에는 부모님과 화엄사 인근 콘도로 여름 휴가를 자주 왔던 탓인지 별반 낯설지 않은 고장이다.

사성암에서 바라본 구례 읍내. 붉은 원이 봉성산이다. [사진=한정곤 기자]
사성암에서 바라본 구례 읍내. 붉은 원이 봉성산이다. [사진=한정곤 기자]

구례는 북동부에 솟은 지리산으로 유명한 고을이다. 동쪽에는 지리산의 지봉인 노고단·반야봉·황장산 등이 있고 북쪽에는 만복대·견두산이, 서쪽에는 천마산·깃대봉 등이, 남쪽에는 도솔봉·형제봉 등이 솟아있다. 사방을 둘러싼 첩첩 산지 가운데에 구례분지가 들어앉아 있다. 지리산의 지맥인 산성봉(438m)과 논곡리 천왕봉(695m) 줄기가 뻗은 산기슭에 크고 작은 마을이 자리를 잡고 진산인 봉성산은 구례읍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봉성산은 주변 산들과 비교하면 해발 165m에 불과한 야트막한 동네 야산이지만 70여 년 전 군·경에 의해 저질러진 참혹한 민간인 학살의 비극을 품고 있는 산이다. 지창수·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조국통일·인민해방을 내걸고 봉기한 여순사건의 피바람이 봉성산에 묻혀있다.

여순사건 발발 한 달째인 1948년 11월19일 새벽 군경은 반란군에 먹을 것을 제공했거나 혈연관계라는 이유로 구금하고 있었던 민간인 72명을 경찰서 옆 연병장으로 끌어냈다. 전날 저녁 토벌대였던 국군 제2여단 12연대의 주둔지인 중앙초교와 구례경찰서를 반란군이 급습하자 연행한 주민들을 구출하기 위한 공격으로 판단한 군경이 이날 총살형을 집행한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 총살당한 주검들은 토벌대가 매복해 있던 봉성산 정상 너머 서쪽 사면에 매장됐다.

봉덕정 입구. [사진=한정곤 기자]
봉덕정 입구. [사진=한정곤 기자]

◇ 노송과 철쭉·벚꽃이 어우러진 풍광
새벽 동이 틀 무렵 가벼운 운동복차림으로 한가로이 봉성산 산책길 입구로 들어서는 중년 남녀를 지나쳐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포장된 왼쪽 산길로 방향을 잡는다. 20여m 오르막길 끝에 한옥 건물이 반긴다.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새벽을 여는 수닭 대신 개 한 마리가 요란하게 짖어댄다. 도둑질을 하러 오지 않은 이상 묶여있는 개는 개가 아니다. 놀랄 이유가 없다.

봉덕정 사정 앞에서 내려다본 입구. [사진=한정곤 기자]
봉덕정 사정 앞에서 내려다본 입구. [사진=한정곤 기자]

오히려 사전 조사를 통해 알고 있던 입구가 아니어서 당황스럽다. 다시 찾아간 입구는 고풍스런 옛 정취를 그대로 안겨준다. 자동차로 진입할 수 없는, 노송 두 그루가 수문장처럼 양쪽에 버티고 서 호위하는 듯 조성된 돌계단 오른쪽 아래에 큼지막한 봉덕정(鳳德亭) 표지석이 위엄을 자랑한다. 봉성산 동쪽 사면으로, 여순사건 학살피해자들이 암매장된 서쪽 사면의 반대편이다.

봉덕정은 전국 활터 가운데 아름답기로 치면 손가락에 꼽힌다. 옛 멋을 간직한 사정(射亭) 건물을 비롯해 사대에서 왼쪽으로 노송과 철쭉이, 오른쪽으로는 벚나무가 즐비해 봄이면 벚꽃이 지천을 이루는 ‘울긋불긋 꽃대궐’ 같은 경치는 감히 여느 활터가 따라올 수 없다. 다만 13그루였던 노송의 절반 이상이 화장실을 조성하면서 애꿎게 잘려 나갔다는 말에 절로 아쉬운 한숨이 나온다.

그러나 어디 노송뿐이랴. 지금 새벽을 깨우며 세상 밖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봉덕정도 올해 7월이면 더 이상 사진 속에서만 존재하는 활터가 된다. 현재 3개의 과녁을 4개로 늘리기 위해 오른쪽 산비탈을 10여m 깎아내고 확장하는 공사가 연말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물론 사대도 과녁 4개에 걸맞도록 뜯어고쳐야 하고 운치를 더해주는 과녁 뒤편 담장도 사라진다. 어차피 현재의 사정 건물도 비좁다며 헐고 새로 세운 정자이고 보면 활터 확장을 위해 풍광쯤 뜯어고치는 일은 대수도 아니다. 내년쯤 봉덕정은 넓고 쾌적한 활터가 되겠지만 훗날 언젠가 누군가는 또 다소 비좁고 불편했던 지금의 봉덕정을 그리워하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 노사학파 성리학자의 ‘봉덕정기’
봉덕정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오래전 봉성산 동쪽 기슭에 퇴락한 사정터가 있었고 1924년 그 터에 건립된 봉성루(鳳城樓)가 1933년 새로운 사정 신축과 함께 봉덕정(鳳德亭)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는 사실만 확인된다. 규장각 소장 구례현 지도에 서쪽으로 봉성산이 있고 그 아래 정방형 읍성과 읍성 북동쪽 바깥에 사정이 있다는 기록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확인이 되지 않는다. 다만 봉덕정 사정 건물 안에 걸린 ‘봉덕정기(鳳德亭記)’에는 이 같은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봉덕정기. [사진=한정곤 기자]
봉덕정기. [사진=한정곤 기자]

“봉성에 어느 때부터 사정이 있어왔는지 모르나 중간에 난리를 겪어 정이 없어지매 향사의 옛 자취를 찾을 길 없고 다만 옛 활터만 남아 있었는데 갑자(1924년)에 군민이 봉성산 동쪽 기슭에 봉성루를 세웠고 거기에다 사정을 붙여 만들어 습사를 하여 왔는데 사원이 많아짐에 따라 사정이 좁아 불편을 느낀 나머지 계유(1933년) 김광훈·김재호 등이 사정을 다시 세우기로 결정하고 사원들의 합의를 얻어 재원을 모아 을해(1935년) 가을에 봉성루를 헐고 사직단 옛터 옆에 사정을 개창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병자(1936년) 여름에 준공이 되었다.

이에 웅장한 와가 대마루와 기둥이 푸르른 송림 가운데 우뚝 솟아 바람 맑고 달 밝으며 질펀한 들 기운은 산이 함께 비쳐오고 용과 봉이 날아오르니 물이 안고 흐르며 구름 날고 안개 자니 여기가 진실로 덕을 닦고 무를 익히는 좋은 도장이라 하겠다 하지 않겠는가.

이윽고 날이 비끼면 무사들이 과녁을 향해 늘어서서 큰 잔을 벌여놓고 떼를 지어 차례로 활을 쏘아 각자 그 재주를 다하여 이기지 못한 무사에게 벌주를 먹이게 하는데 그 화기 있고 서로 사양하는 기동이 순후한 옛풍속이 완연하다.

드디어 봉덕정이라 현판을 달고 나에게 기를 부탁해 왔다. 나는 오래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사(射)라 하는 것은 육예(六藝)의 하나인데 상대를 업신여기지 말고 나를 돌이켜 살피는 마음이 행하여져서 서로 거리낌이 없어야 되기 때문에 일찍이 선비가 이를 익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근세에 이르러 총포와 창이 나타나매 활쏘기가 차차 줄어가고 또 활을 쏜다 하여도 관덕의 뜻을 아는 이 거의 없으며 무사들이 모여서 활쏘기를 하여도 다만 한때의 흥취와 장난을 면하지 못한다면 이 어찌 옛사람이 전하여 준 활쏘기 정신이라 하리오.

이 정(亭)에 오른 이 마땅히 그 행동을 예(禮)에 맞게 하며 그 뜻을 바르게 하고 그 몸가짐을 자상히 하고도 굳게 할지니 이러한 연후에야 가히 관중을 말하고 가히 관덕을 말할 것이다. 진실로 이런 실상이 없이 다만 장난을 일삼으면 무엇이 몸에 도움이 되며 무엇이 국가에 도움이 있으리오.

하물며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하루아침에 활터에 서서 과연 능히 재력을 뽐내고 재주와 꾀를 다하여 세상에 없는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비록 그러나 덕이 근본이 되고 공이 다음가며 공을 세운 것도 또한 덕을 쌓은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오직 여러 무사들은 정(亭)에 달린 봉덕정 현판을 자주 돌아보며 각자의 뜻을 더욱 가다듬어 이 사정으로 하여금 길이 세상에 들림이 있게 하기를 당부하는 바이다.

이 역사가 전 사원의 힘을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김재호·정방언·고광수 등의 공이 컸으며 정(亭)이 준공된 뒤에 박동호를 사수로 맞았다.”

봉덕정 전경. [사진=안한진]
봉덕정 전경. [사진=안한진]

‘봉덕정기’는 1936년 10월 호남지방 성리학을 대표했던 노사학파((蘆沙學派)의 대표적인 문인 정기(鄭琦)가 작성했다. 자는 경회(景晦), 호는 율계(栗溪)이며 초명은 정재혁(鄭在赫)이다. ‘봉덕정기’에 남긴 ‘서주(瑞州)’라는 호는 그의 본관인 서산(瑞山)의 옛 지명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1878년 경상남도 합천군 율진(栗津) 출신인 그는 1899년(광무3년) 노백헌·정재규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했다. 1905년(광무9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을 도와 동지를 규합했고 1921년 만주와 간도를 세 차례나 왕복하면서 빼앗긴 국권회복에 힘썼지만 왜세가 더욱 거세지자 뜻을 잃고 금강산·두류산 등을 주유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기도 했다.

구례와 인연을 맺은 것은 나이 49세 때인 1927년 토지면 덕천으로 이사하면서부터다. 이곳에 오원재(五爰齋)와 덕천정(德川亭)을 짓고 강학당으로 삼아 후진을 양성했다. 1950년 사망할 때까지 모두 445편의 시를 남겼다. 그의 시에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 흔적이나 난세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기도 하다. 또한 형식적 기교나 멋보다 내용의 표현을 더 중시했다. 문집으로 『율계집(栗溪集)』이 있다.

그는 봉덕정 사원은 아니었다. 유학자이면서도 불교를 이단시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호의를 갖고 회통했음이 그의 시에서 확인되고 구례 이주 이후에는 지인들과 교유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산 궤적도 확인돼 당시 구례 유지들이 주를 이루었던 봉덕정 사원들과 교류하며 ‘봉덕정기’ 작성도 부탁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구례 관아의 동헌이었던 봉덕정 사정. [사진=한정곤 기자]
조선 시대 구례 관아의 동헌이었던 봉덕정 사정. [사진=한정곤 기자]

◇ 활터로 옮겨온 면장 직무실 건물
1936년 준공한 현재의 사정 건물은 정면 4칸·측면 3칸 규모의 재실형(齋室形) 팔작지붕으로 조선 시대 구례 관아의 동헌(東軒) 건물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현내면과 계사면이 통합돼 구례면이 된 이후 면장실로 사용했던 건물을 활터 사정으로 옮겨와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사정 건물 정면에는 1936년 소하(小荷) 김형교(金炯嶠)가 쓴 ‘봉덕정(鳳德亭)’ 현판이 세월을 먹고 빛이 바랜 채 걸려 있다. 봉덕정은 봉성산의 ‘봉(鳳)’과 관덕의 ‘덕(德)’을 합친 이름이다.

소하 김형교는 구례 태생이라는 사실 외에는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체(書體)가 창건(蒼健)하고 필법(筆法)이 정교(精巧)해 물이 용솟음치고 바람이 일어난다는 수용풍발(水湧風發)한 글씨가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봉덕정 현판. [사진=한정곤 기자]
봉덕정 현판. [사진=한정곤 기자]

사정 건물은 남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기운 사대와는 방향을 달리해 동쪽 구례읍내를 바라보고 있다. 사정 건물 측면에 배치된 사대가 조금은 부자연스럽다. 특히 뒤쪽 처마를 연결해 덧댄 사대 지붕은 사정 건물의 본래 모습까지 해치고 있어 볼썽사납다. 여느 활터와 같이 여름 햇볕과 겨울 추위를 막기 위해 기존 사정 건물에 사대를 추가하면서 발생한 부조화다.

내부에는 오는 7월 공사를 앞두고 옮겨 쌓아 놓은 각종 집기들로 다소 혼잡했지만 대들보에 걸린 ‘봉덕정기’를 비롯해 벽면 위쪽 사원명단을 새긴 편액들이 세월의 더깨를 전해준다. 각종 전국대회에서 입상한 우승기와 상장도 즐비하다.

문선회 봉덕정 사범은 “1960년 이후 전국대회 개인전·단체전 우승만 150여회가 넘는다”면서 “문계환 사원의 경우에는 개인전 우승만 50회에 달한다”고 설명한다.

봉덕정 한운교 고문이 새벽 습사를 하고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봉덕정 한운교 고문이 새벽 습사를 하고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사대에서 바라본 과녁은 145m가 맞나 싶을 만큼 시각적으로 가깝게 다가온다. 오른쪽 산비탈과 왼쪽의 높은 나무들이 무겁까지 일렬로 도열해 시야가 분산되지 않고 무겁으로 좁혀지면서 오는 안정감으로 인한 착시현상으로 이해된다.

봉덕정 사원은 현재 여무사 2명을 포함해 63명이다. 과거 지역 유지들만 드나들었던 지방 활터의 사정이야 비슷하겠지만 구례는 유독 다른 지역보다 배타성이 강해 입사(入射)가 어려웠다고 문선회 사범은 전한다. 내부에 걸린 역대 사원명단 편액에서도 사원 수가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추측건대 외부 세력의 침입이 잦았던 지방과 달리 내륙 깊숙이 들어앉은 지리적 특성으로 무관보다는 문관에 의한 풍류의 활쏘기가 이어져 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 동편제 판소리와 구례향제줄풍류
봉덕정은 동편제 본고장답게 판소리의 맥을 잇는 사원들이 있다. 구례는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을 풍미했던 5명창 가운데 한 명인 송만갑을 배출한 고장이다. 그는 큰할아버지 송흥록·아버지 송우룡·동생 송광록으로 이어진 동편제 송씨 가문의 소리 법통을 토대로 서편제 명창이었던 정창업의 소릿제를 접목시켜 동편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송만갑 명창은 활쏘기를 하지 않았지만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봉덕정에는 기생들이 출입하며 풍류와 활쏘기를 즐겼다고 문선회 사범은 전한다. 실제 역대 사원명단이 담긴 편액에서도 1930년대부터 3~4명의 여무사 이름이 확인된다. 현재도 최천식 봉덕정 제42대 사두를 비롯해 2명의 사원이 동편제 판소리 문하생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3월 사두 취임식에는 구례 판소리 동호회 회원들이 참석해 축하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하늘에서 본 봉덕정 사정. [사진=안한진]
하늘에서 본 봉덕정 사정. [사진=안한진]

동편제 판소리와 함께 구례지방에는 전승되고 있는 구례향제줄풍류(求禮鄕制줄風流)도 이철호 등 사원 3명이 문하생이다. 거문고를 중심으로 가야금, 양금, 해금, 대금, 세피리, 단소, 장구를 곁들여 연주하는 현악영산회상(絃樂靈山會上)이다. 거문고와 가야금의 은은하고 꿋꿋한 음이 연주되고 단소, 대금, 해금, 피리가 장식적인 선율을 수놓으며 연주되면 조용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연출되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음악으로 평가된다. 1985년 9월 중요무형문호재 제83호로 지정됐지만 현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3-1호로 분리됐다.

전설적인 풍류명인 추산 전용선으로부터 구례향제줄풍류를 전승받은 이는 봉덕정 사원이었던 백경 김무규다. ‘단소 명인’으로 익히 알려진 그는 1955년 12대부터 1975년 18대까지 무려 21년 동안이나 사두(射頭)를 역임했다. 종신제가 아닌 임기제로는 전국 활터 가운데 최장기간이 아닐까 싶다.

봉덕정 사대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봉덕정 사대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1908년 구례읍 산성리 절골의 천석꾼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집에서 한학을 공부했던 그는 앞에서 소개한 ‘봉덕정기’를 1982년 여름 처음 우리말로 옮기도 했다. 당시 그는 번역의 어려움에 대해 이 같은 글을 남겼다.

“사원들의 요청에 의해 번역을 맡기는 했지만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니 하나는 문장이 너무 승해 나의 단문으로는 원만히 번역하기가 어려움이 있었고 또 하나는 필자가 옛날 향사례의 의식 절차를 문헌에서만 취재해 썼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번역하면 일반사원들의 이해가 힘들기 때문에 여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본문의 뜻과 너무 멀리 할 수 없어 그런 대로 번역을 해보았지만 다만 뒷날 다행히 안목있는 이의 교정을 기다리는 바이다.”

그는 15살 때인 1923년 두 살 연상인 매천 황현 선생의 손녀 황묘숙과 결혼한 뒤 처가 쪽 항일사상의 영향을 받아 금란회(金蘭會)를 조직해 항일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8·15광복 후에는 구례중학교(현 구례고등학교)를 설립해 국어·국사를 가르치는 평교사로 재직했고 교감과 교장을 역임하는 등 10여년간 교육계에도 몸을 담았다. 그러나 1960년 정치에 뜻을 두고 몇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했다. 훗날 외도를 후회를 했지만 이미 가산을 탕진한 뒤였다.

영화 ‘서편제’에서 거문고를 타는 백경 김무규. [영화 ‘서편제’ 캡처]
영화 ‘서편제’에서 거문고를 타는 백경 김무규. [영화 ‘서편제’ 캡처]

영화 ‘서편제’에서는 그의 살아생전 연주 모습을 볼 수 있다. 여주인공인 송화가 눈이 먼 후 아버지 유봉과 함께 호젓한 산길을 걷다가 어느 퇴락한 기와집에 잠시 머무는 장면이 나온다. 그 집의 주인은 하얀 한복을 입고 정자에 앉아 거문고를 켜고 유봉이 그 앞에서 구음을 부른다. 이 장면에서 거문고를 연주한 주인공이 바로 백경 김무규 명인이다.

◇ ‘봉성산 아래 푸른 대나무처럼 봉덕정을 지켜라’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명인명창 이야기’를 통해 백경과의 특별한 인연을 소개한 바 있다.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병이 걸려 휴학을 하고 지리산 상선암이란 암자에서 잠시 휴양하고 지내던 겨울날입니다. 그해 여름에 판소리를 처음 듣고 한창 판소리에 열이 올라있던 제 귀에 구례에 산다는 ‘단소 명인’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암자에서 만난 친구 2명과 함께 지체없이 그 명인을 찾아 나섰습니다.

구례읍내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산길을 물어물어 걸어간 끝에 절골 마을에 사는 김무규 명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멋지고 고풍스러운 기와집을 찾아가니 호리호리한 명인이 우리를 맞았습니다.

그는 꿀 한 통을 드리며 단소를 배우러 왔다는 산 청년들에게 “이 어려운 걸 뭐하러 배우려 하느냐?” 하시면서도 먼 길을 걸어 온 정성이 갸륵했던지 다음에 한 번 찾아오라고 허락을 하셨습니다.

며칠 뒤에 다시 찾아가니 집 뒤에 있는 대나무 숲에서 대를 잘라 단소 세 자루를 만들어 놓으셨다가 선물로 주며 단소 부는 법의 기초부터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제가 판소리에 관심이 있는 걸 아시고는 김소희 명창이 여름이면 제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 연습을 하러 오기도 한다고 하시며 명창들과 관련된 옛날얘기를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아쉽게도 그 분에게 몇 번밖에 단소를 배우지 못하고 몇 달 뒤에 복학해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연은 끊어지지 않아 나중에 그 분의 이력을 소개하는 인터뷰 기사도 쓰고 ‘서편제’를 통해 제가 반했던 기와집과 대숲이 멋지게 등장하고 새하얀 한복을 입고 거문고를 치는 그 분의 모습도 영상에 담을 수 있었으니 기이한 인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영화 ‘서편제’에서 김무규와 김명곤이 사랑채에 앉아 소리를 하고 있다. [영화 ‘서편제’ 캡처]
영화 ‘서편제’에서 김무규와 김명곤이 사랑채에 앉아 소리를 하고 있다. [영화 ‘서편제’ 캡처]

그는 평생 야인이 되어 밭이나 갈다가 늙어 죽겠노라고 ‘백경(白耕)’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울적한 심사를 단소나 거문고로 달래거나 활터에 나가 활을 쏘며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시절을 보냈던 그의 삶을 그대로 대변하는 호가 아닐 수 없다.

좌궁이었던 그의 활쏘기 실력은 전국대회 단체전에서만 11차례 우승한 경력으로 입증이 충분하다. 1976년 봉덕정에서 집궁한 이후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백경을 따랐던 문선회 사범이 기억하는 백경은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는, 범접하기 어려운 분”이었다.

봉덕정 사원 가운데 유일하게 백경으로부터 ‘봉성산 아래 푸른 대나무처럼 봉덕정을 지켜라’는 의미의 일죽(一竹)이라는 호를 받았다는 문 사범은 “활터에 나오지 않아도 집에 관포(貫布)를 걸어놓고 활쏘기했다”면서 “당시 사용했던 관포 한 장을 현재 보관하고 있다”고 말한다.

◇ 활터에는 나오지 않아야 할 시(詩)
영화 ‘서편제’에도 나왔다는 백경의 기와집을 보고 싶었지만 지금 산성리 절골에는 빈터만 남아 있다. 1922년 지어진 고택은 사랑채, 안채, 문간채, 별채 등 여덟 채로 사랑채에는 기둥마다 시구나 글귀를 써 주련을 내걸린 양반 상류주택의 배치 형식으로 알려진다.

백경의 고택을 보기 위해서는 순천 낙안의 뿌리깊은나무박물관까지 가야 한다.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을 창간해 ‘잡지계의 혁명가’로 불리며 한국의 토박이 문화를 대중에 소개했던 선구자 한창기가 모은 6500여점의 유물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물에는 백경의 고택이 포함돼 있다. 한창기는 1980년 백경의 고택을 보고 한순간에 매료돼 탐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7년 그는 사망했지만 2006년 후손들이 매입해 원형 그대로 옮겨왔다. 철학과 사상은 물론 문화와 예술, 언어에 이르기까지 한국적인 것에 집착했던 한창기가 살아 있다면 후손들의 이 같은 행위를 두고 어떤 말을 했을지 자못 궁금하다.

<동영상 촬영=안한진>

허탈한 마음으로 봉덕정을 나서면서 ‘5월시’ 동인으로 활동한 시인 나종영의 시 ‘수오당(羞烏堂)’을 떠올린다. 수오당은 지금 빈터만 쓸쓸하게 남은 백경 선생의 옛집을 말한다. 누군가 활터에는 이런 시를 남기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아름다운 것은 풍경이 아니라
사람이 걸어온 길이다
구례 산성리 절골에 가면 층층 세월의 켜를 이고
아름답게 늙어가는 고적한 집 한 채가 있었다
적요한 섬 안에 갇혀 있는 오래된 집 한 채,
목마른 까마귀 떼가 동천 하늘을 뒤덮고
적송 바람소리가 꽃살문을 훔치다 잦아들면
누마루에선 홀연 애끓는 단소소리와
고금(古琴)이 한을 품어 우는 소리가 담장을 넘어
흩어지다 돌아오곤 했다
돌담장 아래 영산홍 봉오리가 멍울지거나
안개비 속에 뒤란 청청 대숲이 수런거릴 때면
아무도 오지 않는 절골 돌담길에 나와
무심히 치자빛 해넘이를 바라보는
흰 두루마기 노인이 적막하고 처연하기도 했다
흘러가는 것이 시간만이 아니라
슬픔 또한 흘러간다는 것을
대풍류 소리 하나로 산천을 떠돌아 본
노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때는 나라 잃은 설움에 울고
한때는 길 위에 세상을 세우고자 울분을 삭였지만
모든 것들이 한 줄 대피리 소리보다 못하고
하늘을 나는 한 마리 까마귀 보기에도 부끄러웠다
그래도 새벽 담장을 넘어온 산(山)사람들에게
밥 한술 먹여 보낸 일이나마 인생지사
사뭇 다행한 일이라고 했다
매천사(梅泉祠 ) 너머 지리산에 노을처럼 철쭉이 붉어오면
단소소리가 애절양(哀絶陽) 소리이듯
누마루를 돌아 저문 지붕을 넘어 사라져 갔다
지금은 종적도 없이 폐허가 되어버린 수오당 터,
슬픔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흔적 없이 사라진 사람의 삶이다
낡고 오래된 집 한 채,
가슴 한 켜가 미어져 내려앉듯
추녀마루가 무너져 내리던 옛집은 어디로 갔을까
소문은 혼령처럼 고개 너머 횡행했지만
나는 차마 다시는 절골에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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