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객들의 멋과 흥을 전하는 활터…구례 봉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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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객들의 멋과 흥을 전하는 활터…구례 봉덕정
  • 한정곤 기자
  • 승인 2021.04.30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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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⑪ ‘단소 명인’ 백경 김무규의 삶·예술·활쏘기
봉덕정 전경. [사진=안한진]
봉덕정 전경. [사진=안한진]

동편제의 본고장으로 가는 길에서 듣는 음악은 역시 판소리 『적벽가』가 제격이다. 수많은 군대와 장수들이 등장하고 전투하는 사설이 많아 빠른 장단에 웅장하고 씩씩한 호령조를 특징으로 하는 가장 남성적인 판소리로 평가된다.

처음부터 소리로 전해온 『춘향가』나 『심청가』와 달리 소설이 소리로 변화한 『적벽가』는 상대적으로 사설이 복잡하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장엄하고 꿋꿋한 우조(羽調) 위주의 소리이기 때문에 남성 소리꾼을 주축으로 하는 동편제 계열에서 많이 불렀다.

◇ 「조자룡 활쏘는 대목」에 등장하는 집궁제원칙
『적벽가』 중에서도 활꾼이라면 「조자룡 활쏘는 대목」을 빼놓을 수 없다. 오나라 주유는 서성과 정보 두 장수에게 하늘에 동남풍을 빌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제갈공명을 제거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공명은 이를 예상하고 이미 조자룡을 대기시켰다. 따라서 사설은 공명이 안전하게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임무를 부여받은 조자룡이 활을 쏘아 추격해 오는 오나라 두 장수를 물리치는 내용이다.

소이광 화영이 『수호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호걸 가운데 유일한 신궁(神弓)이라면 『삼국지』에서는 단연 상산 조자룡이다. 특히 「조자룡 활쏘는 대목」을 듣다 보면 익숙한 단어들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가는 배 머무르고 오는 배 바라보며 백보 안에가 드듯마듯 장궁철전(長弓鐵箭)을 먹여 비정비팔(非丁非八)허고 흉허복실(胸虛腹實)하야 대두(大頭)를 숙이고 호무뼈 거들며 주먹이 터지게 줌통을 꽉 쥐고 삼지(三指)에 힘을 올려 궁현(弓弦)을 따르르르르 귀밑아씩 정기일발(精氣一發) 깍지손을 딱 떼니 번개같이 빠른 살이 해상으로 피르르르 서성 탄 배 덜컥 돛대 와지끈 물에가풍 오든 배 가로저 물결이 뒤채여 소슬광풍(簫瑟狂風)에 뱃머리 빙빙빙빙빙 돌고 물결은 워리렁 출렁 뒤뚱그려 본국으로 떠나간다.”

신사(新射) 때부터 귀에 닳도록 들어왔던 ‘집궁제원칙(執弓諸原則)’이 실전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동영상 촬영=안한진>

◇ 민간인 학살의 비극을 품은 봉성산
서울에서부터 300km를 달려 땅거미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할 즈음 구례땅으로 들어선다.

완만하게 흘러내리는 산줄기 아래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이 곳곳에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예전 같았으면 아궁이에서 뿜어내는 저녁밥 짓는 연기가 하늘하늘 춤을 추며 오르고 있을 시간이다. 그때보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편리한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데도 모두들 이유 없이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고등학교 땐 천은사로 불교학생회 수련회를, 대학 시절엔 산동면으로 농촌활동을, 졸업 후에는 부모님과 화엄사 인근 콘도로 여름 휴가를 자주 왔던 탓인지 별반 낯설지 않은 고장이다.

사성암에서 바라본 구례 읍내. 붉은 원이 봉성산이다. [사진=한정곤 기자]
사성암에서 바라본 구례 읍내. 붉은 원이 봉성산이다. [사진=한정곤 기자]

구례는 북동부에 솟은 지리산으로 유명한 고을이다. 동쪽에는 지리산의 지봉인 노고단·반야봉·황장산 등이 있고 북쪽에는 만복대·견두산이, 서쪽에는 천마산·깃대봉 등이, 남쪽에는 도솔봉·형제봉 등이 솟아있다. 사방을 둘러싼 첩첩 산지 가운데에 구례분지가 들어앉아 있다. 지리산의 지맥인 산성봉(438m)과 논곡리 천왕봉(695m) 줄기가 뻗은 산기슭에 크고 작은 마을이 자리를 잡고 진산인 봉성산은 구례읍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봉성산은 주변 산들과 비교하면 해발 165m에 불과한 야트막한 동네 야산이지만 70여 년 전 군·경에 의해 저질러진 참혹한 민간인 학살의 비극을 품고 있는 산이다. 지창수·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조국통일·인민해방을 내걸고 봉기한 여순사건의 피바람이 봉성산에 묻혀있다.

여순사건 발발 한 달째인 1948년 11월19일 새벽 군경은 반란군에 먹을 것을 제공했거나 혈연관계라는 이유로 구금하고 있었던 민간인 72명을 경찰서 옆 연병장으로 끌어냈다. 전날 저녁 토벌대였던 국군 제2여단 12연대의 주둔지인 중앙초교와 구례경찰서를 반란군이 급습하자 연행한 주민들을 구출하기 위한 공격으로 판단한 군경이 이날 총살형을 집행한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 총살당한 주검들은 토벌대가 매복해 있던 봉성산 정상 너머 서쪽 사면에 매장됐다.

봉덕정 입구. [사진=한정곤 기자]
봉덕정 입구. [사진=한정곤 기자]

◇ 노송과 철쭉·벚꽃이 어우러진 풍광
새벽 동이 틀 무렵 가벼운 운동복차림으로 한가로이 봉성산 산책길 입구로 들어서는 중년 남녀를 지나쳐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포장된 왼쪽 산길로 방향을 잡는다. 20여m 오르막길 끝에 한옥 건물이 반긴다.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새벽을 여는 수닭 대신 개 한 마리가 요란하게 짖어댄다. 도둑질을 하러 오지 않은 이상 묶여있는 개는 개가 아니다. 놀랄 이유가 없다.

봉덕정 사정 앞에서 내려다본 입구. [사진=한정곤 기자]
봉덕정 사정 앞에서 내려다본 입구. [사진=한정곤 기자]

오히려 사전 조사를 통해 알고 있던 입구가 아니어서 당황스럽다. 다시 찾아간 입구는 고풍스런 옛 정취를 그대로 안겨준다. 자동차로 진입할 수 없는, 노송 두 그루가 수문장처럼 양쪽에 버티고 서 호위하는 듯 조성된 돌계단 오른쪽 아래에 큼지막한 봉덕정(鳳德亭) 표지석이 위엄을 자랑한다. 봉성산 동쪽 사면으로, 여순사건 학살피해자들이 암매장된 서쪽 사면의 반대편이다.

봉덕정은 전국 활터 가운데 아름답기로 치면 손가락에 꼽힌다. 옛 멋을 간직한 사정(射亭) 건물을 비롯해 사대에서 왼쪽으로 노송과 철쭉이, 오른쪽으로는 벚나무가 즐비해 봄이면 벚꽃이 지천을 이루는 ‘울긋불긋 꽃대궐’ 같은 경치는 감히 여느 활터가 따라올 수 없다. 다만 13그루였던 노송의 절반 이상이 화장실을 조성하면서 애꿎게 잘려 나갔다는 말에 절로 아쉬운 한숨이 나온다.

그러나 어디 노송뿐이랴. 지금 새벽을 깨우며 세상 밖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봉덕정도 올해 7월이면 더 이상 사진 속에서만 존재하는 활터가 된다. 현재 3개의 과녁을 4개로 늘리기 위해 오른쪽 산비탈을 10여m 깎아내고 확장하는 공사가 연말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물론 사대도 과녁 4개에 걸맞도록 뜯어고쳐야 하고 운치를 더해주는 과녁 뒤편 담장도 사라진다. 어차피 현재의 사정 건물도 비좁다며 헐고 새로 세운 정자이고 보면 활터 확장을 위해 풍광쯤 뜯어고치는 일은 대수도 아니다. 내년쯤 봉덕정은 넓고 쾌적한 활터가 되겠지만 훗날 언젠가 누군가는 또 다소 비좁고 불편했던 지금의 봉덕정을 그리워하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 노사학파 성리학자의 ‘봉덕정기’
봉덕정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오래전 봉성산 동쪽 기슭에 퇴락한 사정터가 있었고 1924년 그 터에 건립된 봉성루(鳳城樓)가 1933년 새로운 사정 신축과 함께 봉덕정(鳳德亭)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는 사실만 확인된다. 규장각 소장 구례현 지도에 서쪽으로 봉성산이 있고 그 아래 정방형 읍성과 읍성 북동쪽 바깥에 사정이 있다는 기록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확인이 되지 않는다. 다만 봉덕정 사정 건물 안에 걸린 ‘봉덕정기(鳳德亭記)’에는 이 같은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봉덕정기. [사진=한정곤 기자]
봉덕정기. [사진=한정곤 기자]

“봉성에 어느 때부터 사정이 있어왔는지 모르나 중간에 난리를 겪어 정이 없어지매 향사의 옛 자취를 찾을 길 없고 다만 옛 활터만 남아 있었는데 갑자(1924년)에 군민이 봉성산 동쪽 기슭에 봉성루를 세웠고 거기에다 사정을 붙여 만들어 습사를 하여 왔는데 사원이 많아짐에 따라 사정이 좁아 불편을 느낀 나머지 계유(1933년) 김광훈·김재호 등이 사정을 다시 세우기로 결정하고 사원들의 합의를 얻어 재원을 모아 을해(1935년) 가을에 봉성루를 헐고 사직단 옛터 옆에 사정을 개창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병자(1936년) 여름에 준공이 되었다.

이에 웅장한 와가 대마루와 기둥이 푸르른 송림 가운데 우뚝 솟아 바람 맑고 달 밝으며 질펀한 들 기운은 산이 함께 비쳐오고 용과 봉이 날아오르니 물이 안고 흐르며 구름 날고 안개 자니 여기가 진실로 덕을 닦고 무를 익히는 좋은 도장이라 하겠다 하지 않겠는가.

이윽고 날이 비끼면 무사들이 과녁을 향해 늘어서서 큰 잔을 벌여놓고 떼를 지어 차례로 활을 쏘아 각자 그 재주를 다하여 이기지 못한 무사에게 벌주를 먹이게 하는데 그 화기 있고 서로 사양하는 기동이 순후한 옛풍속이 완연하다.

드디어 봉덕정이라 현판을 달고 나에게 기를 부탁해 왔다. 나는 오래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사(射)라 하는 것은 육예(六藝)의 하나인데 상대를 업신여기지 말고 나를 돌이켜 살피는 마음이 행하여져서 서로 거리낌이 없어야 되기 때문에 일찍이 선비가 이를 익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근세에 이르러 총포와 창이 나타나매 활쏘기가 차차 줄어가고 또 활을 쏜다 하여도 관덕의 뜻을 아는 이 거의 없으며 무사들이 모여서 활쏘기를 하여도 다만 한때의 흥취와 장난을 면하지 못한다면 이 어찌 옛사람이 전하여 준 활쏘기 정신이라 하리오.

이 정(亭)에 오른 이 마땅히 그 행동을 예(禮)에 맞게 하며 그 뜻을 바르게 하고 그 몸가짐을 자상히 하고도 굳게 할지니 이러한 연후에야 가히 관중을 말하고 가히 관덕을 말할 것이다. 진실로 이런 실상이 없이 다만 장난을 일삼으면 무엇이 몸에 도움이 되며 무엇이 국가에 도움이 있으리오.

하물며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하루아침에 활터에 서서 과연 능히 재력을 뽐내고 재주와 꾀를 다하여 세상에 없는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비록 그러나 덕이 근본이 되고 공이 다음가며 공을 세운 것도 또한 덕을 쌓은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오직 여러 무사들은 정(亭)에 달린 봉덕정 현판을 자주 돌아보며 각자의 뜻을 더욱 가다듬어 이 사정으로 하여금 길이 세상에 들림이 있게 하기를 당부하는 바이다.

이 역사가 전 사원의 힘을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김재호·정방언·고광수 등의 공이 컸으며 정(亭)이 준공된 뒤에 박동호를 사수로 맞았다.”

봉덕정 전경. [사진=안한진]
봉덕정 전경. [사진=안한진]

‘봉덕정기’는 1936년 10월 호남지방 성리학을 대표했던 노사학파((蘆沙學派)의 대표적인 문인 정기(鄭琦)가 작성했다. 자는 경회(景晦), 호는 율계(栗溪)이며 초명은 정재혁(鄭在赫)이다. ‘봉덕정기’에 남긴 ‘서주(瑞州)’라는 호는 그의 본관인 서산(瑞山)의 옛 지명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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