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白沙) 이항복④ 꿈속이라도 남의 것 탐하지 않는 청렴결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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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白沙) 이항복④ 꿈속이라도 남의 것 탐하지 않는 청렴결백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12.22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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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㉒
▲ 백사 이항복의 초상.

[한정주=역사평론가] 한양에서 나고 자란 수많은 문사(文士)들은 매년 봄이 되면 필운대를 찾아 서촌(西村), 북악(北岳), 궁궐 그리고 북촌(北村)을 가득 덮은 살구꽃과 복사꽃을 한 눈에 담아볼 수 있는 풍류를 누렸다.

특히 연암(燕巖) 박지원, 다산(茶山) 정약용, 청장관(靑莊館) 이덕무는 물론이고 정조대왕에 이르기까지 18세기 조선의 문화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이들이 하나같이 ‘필운대의 꽃구경’에 관한 시편을 남겼을 정도로 필운대의 산수 풍광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나비가 꽃을 희롱함을 어찌 극성맞다 나무라는가 / 사람들이 오히려 나비 따라 꽃과 인연 맺으려고 달려드네 / 아지랑이 아롱대는 저 너머 한낮 봄은 푸르고 / 마을은 떠들썩하고 도성 큰 길 앞에 먼지가 자욱하네 / 새 울음과 모양새 각각인 건 제 뜻이지만 / 도처에 만발한 꽃은 저 하늘 하고 싶은 대로네 / 이름난 정원에 앉아 둘러보니 어린애는 없고 / 백발의 노인들만 즐기니 작년과 달라진 게 가련하구나.” 박지원,『연암집』, ‘필운대의 꽃구경(弼雲臺賞花)’

“대나무 사립문은 대낮에도 항상 아니 열어놓고 / 계곡의 다리 내버려두니 푸른 이끼 길게 자랐네 / 갑자기 성 밖에서 손님이 찾아와서 / 꽃구경 하려고 필운대로 간다네.” 정약용,『다산시문집』, ‘봄날 체천에서 지은 잡시(春日棣川雜詩)’

“구름 개인 서쪽 성곽에 봄 옷 차려입고 거니니 / 눈에 아른대는 아지랑이 백 길이나 날아오르네 / 연일 해 저물도록 늦어지는 것 사양 말라 / 꽃피어 이 놀이 얼마나 행복한가 / 물고기 비늘 같은 만(萬) 채의 가옥에 꽃향기 피어오르고 / 연꽃처럼 솟아 있는 세 봉우리 햇무리를 품었네 / 경복궁의 땅 밝아 백조(白鳥)가 날아오르니 / 내 마음 너희와 더불어 노닐며 모든 걸 잊었네.” 이덕무,『청장관전서』, ‘필운대(弼雲臺)’

특히 정조는 국도(國都) 한양의 승경(勝景) 여덟 가지를 시로 노래하면서 그 중 ‘필운대의 꽃과 버드나무(弼雲花柳)’를 첫 번째로 꼽았다.

필운대와 더불어 정조가 꼽은 한양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풍경이란 ‘압구정의 뱃놀이(狎鷗泛舟)’, ‘삼청동의 녹음(三淸綠陰)’, ‘자하각의 등불 관람(紫閣觀燈)’, ‘청풍계의 단풍놀이(淸溪看楓)’, ‘반지의 연꽃감상(盤池賞蓮)’, ‘세검정의 얼음 폭포(洗劍氷瀑)’, ‘광통교의 비 갠 뒤 달(通橋霽月)’ 등이다.

“필운대 곳곳마다 번화함을 자랑하니 / 만 그루의 수양버들에 세상 온갖 꽃이네 / 아지랑이 살짝 끼여 좋은 비를 맞이하고 / 새로 지어 빤 비단은 밝은 노을 엮어 놓고 / 백 겹으로 곱게 꾸민 이들 모두 시(詩)의 반려자고 / 푸른 깃대 비껴 솟은 곳 바로 술집이네 / 홀로 문 닫고 글 읽는 이 누구의 아들인가 / 춘방(春坊)에서 내일 아침 다시 조서 내리겠지. (이상은 필운대의 꽃과 버드나무를 읊은 것이다.)” 정조,『홍재전서』, ‘국도팔영(國都八詠)’

▲ 이항복의 문집 『백사집』.

이항복은 꿈을 자주 그리고 많이 꾸었던 모양이다. 그의 문집인 『백사집(白沙集)』을 읽어보면 특이하게도 다른 문사들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꿈’에 대한 글과 기록이 유달리 많다.

물론 이항복처럼 꿈을 자주 꾸는 사람은 흔하다. 그러나 그 꿈에 대해 이항복처럼 많은 글과 기록을 남긴 사람은 아주 드물다.

특히 이항복은 ‘꿈을 기록하다(記夢)’라고 제목 붙인 글에서는 필운대 아래 자신의 집에서 꾸었던 꿈을 실제 겪은 일처럼 자세하게 묘사하면서, 평소 자신이 거처하고 싶었던 ‘필운(弼雲)’이라는 이름을 건 별장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하기도 했다. 때는 이항복이 막 나이 46세가 되던 해였다.

“신축년(辛丑年: 1601년) 정월 11일 밤에 꿈을 꾸었다. 그런데 내가 마치 비를 무릅쓰고 공적인 사무를 보러 어딘가를 향해 가는 듯하였다. 말을 타고 나를 따르는 자가 두 사람이고 걸어서 따르는 자가 다시 4∼5인 정도 되었다.

어느 곳인가를 찾아서 들어갔는데 산천(山川)이 기이하고 상쾌했다. 고개를 들어 길 옆 한 언덕을 쳐다보니 새로 지은 정자가 날개를 펼친 듯 서 있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길인지라 올라가서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 곧바로 막다른 협곡(峽谷)에 도달하자 협곡 안에는 마치 절과 같은 큰 집이 있고 그 옆으로는 민가(民家)가 죽 늘어서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큰 집에 들어가서 무슨 일인가를 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아 적지 못한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이전에 지나왔던 언덕에 다시 이르러 보니 언덕 아래로 시원스레 탁 트인 광장이 있고 하얀 모래가 펼쳐져 있었다. 그 주위를 돌아보니 가히 수 천 보나 되었다.

백 둘레나 되는 큰 나무 다섯 그루가 광장 가운데 늘어서 있어 그늘에 몸을 숨기고 편안히 쉬기에 알맞았다. 언덕 등성이를 타고 올라 마침내 새로 지은 정자에 올랐다. 정결하고 산뜻하기가 자못 인간 세상이 아닌 듯하였다.

정자 안에는 서실(書室)이 있는데, 가로 지은 회랑(回廊)에는 모두 회백색 석회를 발랐지만 아직 단청을 입히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그 밖의 곁채 여러 칸은 아직 다 손을 보지 못하고 다만 기둥을 세우고 기와만 덮어놓았을 뿐이었다.

이에 주변 형세(形勢)를 살펴보니 사면에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큰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들판 가운데에는 세 개의 석봉(石峯)이 우뚝 일어나서 그 모양새가 마치 나계(螺髻: 소라 조개 모양의 상투 혹은 부처 머리 모양)와 같았다.

그러다가 이리 구불 저리 구불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중간에 꺾어져서 다시 솟아올라 언덕이 되었다. 그 언덕의 높이는 겨우 서너 길 정도 되는데, 정자가 언덕 위에 있었다.

언덕 오른쪽으로는 반듯이 넓고 비옥한 들판에 논이 크게 펼쳐져 있었다. 향기로운 벼에 이삭이 패어 바야흐로 바람에 흔들흔들 춤을 추는 파란 벼가 가히 수 백 경(頃)에 달했다. 정북쪽의 여러 산들은 빽빽하게 솟아올라 있고, 큰 골짜기는 깊고 험해 무성하고 울창한 기운이 은은하게 배어나왔다.

정자 앞으로는 멀리 봉우리가 열을 지어 서서 두 개의 동천(洞天)을 이루고 있었다. 두 동천에서부터 나오는 물은 마치 흰 규룡(虯龍)이 구불구불 꿈틀거리며 한 가닥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또 한 가닥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정자 아래에서 두 물줄기가 서로 합해 돌아나가서 하나의 물줄기를 이루었다. 그 넓이가 가히 수 백 보(步)에 달하고 그 깊이는 사람의 어깨까지 차올랐다.

깨끗한 모래가 밑바닥을 이루어 마치 능화경(菱花鏡)과 같이 맑아서 물고기가 오고 가는 모습이 허공에서 노니는 듯 보였다. 개울가에는 하얀 돌이 평평하고 넓게 깔려 있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갈밭을 이루었고, 현(玄) 자 모양으로 흐르는 개울은 정자의 삼면(三面)을 빙 둘러 안고 돌아서 남쪽의 먼 들판으로 흘러갔다.

내가 평생 눈에 담은 풍경 가운데 일찍이 이와 같은 경계(境界)는 없었다. 이에 정자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니 오음(梧陰: 윤두서의 호)의 별서(別墅)라고 했다.

이윽고 윤수찬(尹修撰)이 나와서 나를 맞이하며 ‘상공(相公)이 안에 계십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머뭇머뭇하며 문 밖에 서 있다가 우연히 ‘도원(桃源) 골짜기 안에는 일천(一千) 이랑이 펼쳐져 있고, 녹야(綠野)의 정원 가운데에는 팔룡(八龍)이 깃들었네’라는 시 한 구절을 얻었다.

그런데 연이어 시를 미처 짓지도 못하고 하품하며 웅얼대다가 잠을 깼다. 종이 바른 창은 이미 환했지만 여전히 가슴속에는 상쾌한 여운이 남아 머리카락에 서늘한 바람과 이슬의 기운이 느껴졌다.

마지못해 몸을 일으키고 꿈속에서 본 풍경을 떠올려 화공(畵工)을 청해 그림을 그리게 하려고 했다. 덧붙여 그 위에 시를 쓰려고 하다가 갑자기 스스로 ‘무릉도원의 빼어난 경치에 천묘(千畝)의 부(富)까지 얻고 게다가 녹야원(綠野園)의 한가로움을 누리고 팔룡(八龍)의 복(福)까지 소유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지극한 소원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 내가 이러한 기이한 꿈을 얻었으니, 어찌 구태여 오음(梧陰)에게 양보하고 스스로 옆에서 구경이나 하는 쓸쓸한 객(客)이 될 필요가 있겠는가. 그것은 푸줏간 문 앞에서 고기 씹는 시늉이나 하는 데에 불과하다. 차라리 비밀에 붙여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취해야 겠다’라고 생각하였다.

그 정자의 이름을 ‘필운별서(弼雲別墅)’라 고치고 절대로 윤씨(尹氏)의 집안사람들에게 천기(天機)를 누설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적는다.” 『백사집』, ‘꿈을 기록하다(記夢)’

그런데 이항복은 이로부터 16일 후인 27일 밤에 다시 이 별장에서 오음(梧陰) 윤두수와 더불어 즐겁게 농담하며 노는 꿈을 꾸었다. 산천의 빼어난 경치는 예전 꿈과 같았지만 정자의 모습이 좀 달라져 있었다.

잠에서 깬 이항복은 하늘에서 윤두수에게 내려준 곳을 자신이 사사로이 욕심을 내 훔쳐서 그렇게 되었나 보다 생각하고, 마침내 다시 이 정자의 이름을 ‘오음별서(梧陰別墅)’라고 되돌려 놓았다. 꿈속에서 본 풍경과 물건이라도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청렴결백한 이항복의 선비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재미난 일화다.

어쨌든 산수에 묻혀 사는 삶을 꿈꾸었으나 몸은 전란과 당쟁에 매여 쉽게 관직을 떠나지 못했던 이항복은 꿈속에서나마 산수 간에 노니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평생 꿈꾸었지만 실제로는 갖지 못했던 별장을 꿈속에서나마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항복은 자신이 평생 꿈속에서나마 그렸던 그 별장에 ‘필운별서(弼雲別墅)’라고 이름 붙여 걸고 싶다고 했다. 그만큼 이항복은 ‘필운’이라는 자신의 호를 아꼈던 것이다.

또한 이항복은 ‘임금을 보필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필운(弼雲)의 뜻에 걸맞게, 나라가 전란(戰亂)의 위기에 빠졌을 때는 온 몸을 던져 싸웠고, 간신들이 임금을 미혹(迷惑)에 빠뜨려 나라와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할 때는 죽음을 각오하고 직언(直言)을 올렸다.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에 위치한 이항복의 묘. <포천시 제공>

이로 인해 말년에는 끼니조차 잇지 못할 정도로 곤궁하게 살아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북풍한설(北風寒雪) 몰아치는 북청의 유배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그렇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에도 이항복은 비록 온갖 모함과 누명을 쓰고 갇힌 몸이지만 스스로 ‘호걸(豪傑)’의 삶을 살았다고 자부했다.

“옛 적 송패(松牌)에는 북청(北靑)이라고 적혀 있는데 / 판교(板橋)의 서쪽 밭두둑에서 맞이해주는 사람 적구나 / 겹겹이 쌓인 산들이 참으로 호걸(豪傑)을 가두려고 하는데 / 뒤돌아서 바라보니 일천 봉우리가 갈 길을 막고 있네.” 『백사집』, ‘이월 육일에 북청에 당도하다(二月初六日到北靑)’

<신병주 교수의 ‘백사(白沙)’ 유래 주장에 대한 변명>

신병주 교수는 한국고전번역원의 2011년 12월19일자 <고전산책 고전산문 ‘북악(北岳)의 명소, 이항복의 백사실(白沙室)’> 편에서 ‘백사(白沙)’라는 호가 북악산 기슭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자리하고 있는 ‘백사실(白沙室)’ 계곡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이항복의 호 중 대표적인 것이 필운(弼雲)과 백사(白沙)인데, 필운은 필운대(弼雲臺)와 관련이 깊으며, 백사는 백사실에서 유래한다. … 백사실은 필운대에서 조금 떨어진 북악산 자락에 위치한 비경이었다. 이항복은 1611년 1월 꿈속에서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이곳의 계곡과 흰 모래가 매우 인상이 깊어 백사(白沙)라는 호를 쓰게 되었다. 『백사집』에는 그날의 꿈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덧붙여 신병주 교수는 『백사집』에 실려 있는 ‘꿈을 기록하다(記夢)’을 소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항복의 글에 등장하는 꿈속 장소가 백사실이고, 백사라는 호 또한 이곳의 계곡과 흰 모래에서 취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재 백사실이나 이곳에 남아 있는 별서의 유적이 이항복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추정이자 주장일 뿐이다. 백사실과 이항복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그 어떤 문헌적 증거와 증언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백사라는 호가 백사실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의 사실 여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세상 사람들이 이곳을 ‘백사실(혹은 백사실 계곡)’이라 부르고 있지만, 실제 그곳 바위에 새겨져 있는 지명은 ‘백석동천(白石洞天)’이다. 이 때문에 필자는 신병주 교수의 글을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판단해 채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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