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음(漢陰) 이덕형① 한강 북쪽은 한양(漢陽)·남쪽은 한음(漢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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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漢陰) 이덕형① 한강 북쪽은 한양(漢陽)·남쪽은 한음(漢陰)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12.29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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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㉓
▲ 한음 이덕형의 초상.

[한정주=역사평론가] 현재 서울의 조선 시절 지명인 한양(漢陽)은 아주 쉽게 풀어본다면 한강의 북쪽 햇볕 드는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 즉 한강의 남쪽은 당연히 한음(漢陰)이 될 것이다. 옛적에는 한강의 북쪽과 남쪽을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한강 이남을 가리키는 말인 한음(漢陰)이 바로 ‘오성과 한음’의 한 주인공인 이덕형의 호다.

실제 이덕형의 태생과 죽음은 한강 이남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덕형은 광주(廣州) 이씨(李氏)다. 본관이 경기도 광주라는 얘기다. 또한 이덕형이 죽어 묻힌 묘소는 경기도 양근군 중은동 산등성이(현재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소재)에 있다.

이 두 곳은 모두 한강 이남에 자리하고 있다. 이덕형은 자신의 호처럼 ‘한음(漢陰)’에 뿌리를 두고 세상에 나왔으며, 또한 자신의 육신과 혼백을 ‘한음(漢陰)’에 묻고 세상을 떠났다.

이덕형의 조상은 원래 고려 말엽 광주 지방에 뿌리를 두고 있던 아전(衙前)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덕형의 8대조가 되는 둔촌(遁村) 이집(李集)에 와서 문신(文臣)이자 문사(文士)의 집안으로 크게 이름을 얻었다. 오늘날 서울 강동구 둔촌동(遁村洞)이 바로 이집의 호인 둔촌(遁村)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공민왕 때 신돈이 바른 말을 간(諫)하는 그를 핍박하자, 이 집이 정치적 박해를 피해 은둔했던 곳이 바로 지금의 둔촌동이 된 것이다. ‘서울시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강동구 둔촌동 역시 한강 이남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이덕형의 가문은 정승을 배출하는 등 크게 현달했는데, 이 집의 증손이자 이덕형의 5대조가 되는 이극균(李克均)에 이르러 높은 벼슬뿐만 아니라 충절(忠節)로도 크게 이름을 떨쳤다.

이극균은 벼슬이 좌의정까지 올랐지만 연산군의 폭정과 패륜을 신랄하게 비판하다 미움을 사 끝내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았다. 그런데 그는 사약을 들고 온 이들에게 “나는 나라를 위하여 일한 공은 있으나 사약을 받을만한 죄를 지은 일은 없다. 형리는 임금에게 이 말을 그대로 전하라”고 호통을 칠 만큼 기개가 당당했다고 한다.

이덕형은 이러한 집안의 가풍을 자랑스러워했고 자신이 평생 품고 살아야 할 큰 도리라고 여겨 조상의 혼백이 서린 ‘한음’을 자신의 호로 삼았던 것이다.

이덕형은 벼슬에 나선 이후 온갖 화려한 경력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이미 1591년(선조 24) 31세 때 나라 안의 선비들을 통솔하고 학자들을 대표하는 문형(文衡: 예문관 대제학)에 올라 ‘최연소 문형’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을 호종하고 북쪽으로 피난 가던 도중 뒤따라온 왜군에게 붙잡힐 급박한 상황에 봉착하자 스스로 조그마한 배를 타고 나아가 대동강 한 가운데에서 적군과 담판을 지어 위기를 모면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직접 명나라에 들어가 원군(援軍)을 데려와 불리한 전쟁의 형세를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은 공로가 인정되어 그는 1598년(선조 31년) 불과 38세의 나이에 정승(우의정)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나이에 좌의정을 거쳐 1602년(선조 35년) 42세 때 ‘일인지상 만인지하’의 자리인 영의정이 되었다.

이렇듯 이덕형은 최연소의 나이로 요직(要職)을 두루 거쳤는데, 30여년 관직생활 동안 최고 관직인 영의정을 세 번, 또 나라 안의 선비와 학자들을 대표하는 문형을 세 번이나 지냈다. 임금이나 벼슬아치는 물론이거니와 유림(儒林)과 문사(文士)들 사이에서 이덕형의 능력과 인품 그리고 덕망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와 신뢰가 없었다면 진실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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