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정 위기 극복한 100년 활터…군산 진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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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정 위기 극복한 100년 활터…군산 진남정
  • 한정곤 기자
  • 승인 2021.08.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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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⑰ 신축 가옥 들어선 옛 사정 터…길잡이 표지석 설치

[드론촬영=안한진]

군산여자고등학교 담길을 따라 뻗은 좁다란 길이 월명산으로 이어진다. 월명어린이집을 지나자 길은 오르막으로 바뀌며 가팔라진다. 잠시 차를 멈춘 윤백일 군산 진남정(鎭南亭) 고문이 혼란스러운 듯 머뭇거린다. “4년 전 마지막으로 왔던 때의 길이 아니다”면서도 조금 더 가보자고 올라간 곳에는 하얀 신축 가옥이 들어서 있다.

대문 없는 입구에는 오창환·장정은이라 쓰인 문패가 나무 밑에 놓여 있다. 차를 돌릴 겸 마당까지 들어서는데 허리를 숙이고 텃밭에서 김매기를 하던 집주인인 듯한 여성이 빤히 쳐다본다.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본 윤백일 고문은 그제서야 “이렇게 변했나” 하며 반색한다.

군산에서 자동차부품대리점을 하는 집주인 부부는 이른 아침 낯선 불청객의 불시방문에도 매실차까지 내어 맞이한다. 오랜 아파트 생활이 지겨워 군산 주변의 땅들을 꽤 여러 곳 둘러봤다는 부부는 지난 2018년 공매로 나온 땅을 낙찰받아 새집을 지었단다.

군산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부부는 집터가 활터 정자 자리였다는 사실도, 과녁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또한 옛 활터가 있었던 의미있는 자리라고는 하지만 누가 찾아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반가워한다. 오창환 씨는 “낙찰받을 당시만 해도 뼈대만 남은 한옥 건물은 폐가나 다름없었고 온갖 생활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치우는 비용만도 솔찬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옛 진남정 터에 신축한 가옥. 주차된 자동차 자리가 사대였다. [사진=한정곤 기자]<br>
옛 진남정 터에 신축한 가옥. 주차된 자동차 자리가 사대였다. [사진=한정곤 기자]

마당 앞으로는 마치 산속 절집과 같은 한적한 시골의 목가적 풍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마당 끝 옹벽이 맞닿은 좁은 산길을 건너면 왼쪽엔 월명어린이집이 보이고 오른쪽엔 축대를 쌓아 올려 수평을 맞춘 땅이 떠받친 비닐하우스가 수목에 가려 꼬리를 빼꼼 내민다. 멀리 언덕 중턱엔 팔각정 하나가 운치를 더해주고, 그 오른쪽으로 다시 두 그루의 아담한 나무가 외롭지 않다. 오창환 씨가 한 마디를 더한다. “아마 저 나무 바로 밑에 과녁이 있었지요?”

봄에는 벚꽃과 동백꽃이 흐드러지고 대숲 사이를 헤집는 바람 소리가 시원했다는 주차장 앞 옛 사대가 있던 텃밭에서 과녁 자리를 바라보던 안한진 접장은 “활터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활터로 기억됐을 풍광”이라며 아쉬워한다. 사대와 무겁 사이가 움푹 패여 살이 계곡을 건너는 황학정, 나주 인덕정, 남원 관덕정과 비슷한 자연 그대로의 지형이다.

기부채납 형식으로 군산시에 양도했던 활터 부지와 사정 자리에 신축 가옥이 들어선 데 대해 윤백일 고문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문화재 지정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사정을 보존함으로써 군산의 활쏘기 역사를 전하는 상징물이나 국악원 등 우리의 전통을 계승하는 용도로 활용될 것으로 알고 있었단다. 당시 진남정 사원들도 이 같은 보존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군산시의 무관심으로 한동안 폐가로 방치된 사정은 결국 민간으로 매각돼 지금은 활터였다는 흔적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옛 사대 자리에서 본 무겁. 멀리 두 그루 나무 밑에 과녁이 있었다. [사진=한정곤 기자]

윤백일 고문은 이곳이 예전 진남정 터였다는 기록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면서 입구에 조그만 표지석 설치를 요청한다. 부부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흔쾌히 “좋을 대로 하라”고 허락한다. 훗날 누군가 진남정의 역사를 따라 이곳을 찾는다면 표지석은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또 부부는 그들에게도 차 한 잔 내어주고 진남정의 옛 모습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 민원과 부지 매각에 존립 ‘흔들’
군산 도심에서 멀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지형의 활터를 포기한 채 진남정이 8km나 멀리 떨어진 외곽으로 옮겨간 이유는 오래된 활터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고질적인 민원 때문이었다.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진남정이 옮겨가기 전까지만 해도 월명산 활터의 사대와 무겁 중간에는 무허가 민가가 다닥다닥 둥지를 틀고 있었다.

진남정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28년이었다. 군산의 유림과 유지들이 뜻을 모아 1921년 옥구군 경포천변(현 경암동)에 첫 사정을 세웠지만 잦은 하천의 범람으로 7년 만에 터전을 옮겨와야 했다. 정면 4칸 측면 2칸 우진각지붕의 한옥 건물로 중앙 6칸 대청 옆에는 2칸짜리 온돌방이 있었다. 전면에는 세살 4분합문이 달려 안쪽으로 들어올릴 수 있었고 측면과 후면에는 처마 부분이 덧대어져 관람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그 앞쪽에 사대가 있었다.

옛 진남정 사정 전경. [진남정 제공]

그러나 사정 설립 당시 월명공원 부지였던 이곳에 한국전쟁 이후 하나씩 둘씩 피난민들의 무허가 가옥들이 올라갔고 여러 차례에 걸친 군산시의 양성화 조치로 무겁터 부근 토지마저 개인에게 넘어가면서 민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군산시와 활터 이전도 논의됐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지속적인 민원으로 활터는 제 기능을 잃어 진남정은 사실상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지경까지 내몰렸다.

윤백일 고문은 “활터에서 활을 쏠 수 없으니 입사하겠다는 사람도 없었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받아줄 수도 없었다”면서 “연로한 구사들까지 사망하는 등 활터는 사원이 없어 더 이상 운영이 어려운 폐정 수순을 밟고 있었다”고 말한다. 활터 주변의 공유지를 피난민들의 주거시설이 잠식하자 행정당국이 무분별한 개인 매각으로 맞섰고 활터를 이끌어나갈 사원들의 노령화와 신사 양성까지 뒷전으로 밀리면서 폐정 위기에 내몰린 것이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고 했던가. 쓰러져 가는 사정 기둥을 붙들고 신성휴 사백 홀로 활터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당시 군산교도소에 근무하고 있던 교도관들로 구성된 국궁동아리 금양회(錦陽會) 회원 7~8명이 진남정에 입사했다. 군산교도소 앞 들판에 솔포를 설치하고 활쏘기를 하고 있던 이들은 군산에서 하나뿐인 활터 진남정의 폐정 위기를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입사 이후 군산시와의 협의를 통해 2003년 7월 군산 외항 오식도 배수지 안에 임시사정과 과녁 2개를 설치하고 회생의 길을 모색하는 등 재건에 힘을 보태며 고사 직전의 진남정을 되살려냈다.

옛 진남정 사대에서 본 무겁. 무허가 민가들이 과녁 밑까지 들어섰다. [진남정 제공]

당시 금양회를 이끌었던 서보균 접장은 군산을 떠나 현재 경주교도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1996년 대구 관덕정에서 집궁한 그는 2002년 군산교도소로 전입온 후 활쏘기 보급을 위해 직원들을 모아 금양회를 창립했다. 2004년 용인 법무연수원 교수로 보임한 이듬해 교양과목으로 국궁을 개설했고 현재까지 법무부 소속 공무원들이 연수 기간 국궁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았다. 특히 법무연수원 내에 활쏘기 교육 전문 활터 법화정을 설립하기도 했다.

서보균 접장과 함께 진남정에 입사했던 회원은 채충근, 이형수, 서민철, 윤백일, 김영민, 이평범, 배인수, 남일성, 박현진, 이재용 등이었다. 현재 진남정에 남아있는 회원은 윤백일 고문이 유일하다.

◇ 진포 남쪽의 활터
논과 논을 가르는 사잇길을 빠져나와 널찍하게 조성된 광장 오른쪽 길로 접어든다. 층층이 쌓아 올린 석축 위로 파란 잔디가 곱게 깔린 최호(崔湖) 장군의 유지(遺址)가 말끔한 모습을 드러낸다. 최호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 옆으로 유품과 군산시 향토문화유산인 삼인보검 등을 보관한 기념관이 서 있다.

최호 장군은 1576년(선조 9년) 무과에 장원급제한 뒤 함경도 병마절도사, 충청도 수군절도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정유재란 때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후손 최호선이 1729년(영조 5년) 사당을 처음 건립했고 1976년에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32호로 지정됐다. 2002년 유지 성역화 사업에 따라 이곳에 새로 조성됐다.

진남정 진입로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사당과 전시관을 지나자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좁은 산길이 소나무숲과 대숲을 끼고 또 길게 이어진다.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호젓한 오솔길이라는 말이 나오려다 목구멍을 타고 다시 기어 들어간다. 활쏘기를 위해 매일 이 길을 오르내려야 하는 활꾼들을 생각하면 자동차에 앉아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산인지 구릉인지 원발산 중턱쯤 양쪽 두 갈래 길로 나뉜 지점에서 진남정(鎭南亭)이라 쓰인 표지석을 만난다. 오식도에서의 2년여 와신상담 끝에 마련한 활터다.

2500여평의 부지에 들어선 2층 규모의 사정은 지난 2006년 준공됐다. 겉보기엔 콘크리트 구조물이지만 내부와 사대는 목조기와 구조의 전통양식을 갖춘, 현대와 전통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2층 사대에서 바라본 과녁은 정남향으로 서 있다. 오른쪽을 벽처럼 두른 편백나무 숲은 멀리 들판을 가로지른 바닷바람을 막고 비스듬히 경사진 왼쪽은 대나무 숲이 울창하다. 그래도 오전엔 대숲 쪽에서, 오후엔 편백나무숲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만만치 않다.

동행한 김가화 여무사는 “사대가 평지보다 높아 황학정과 같은 부사(俯射)라고 생각했는데 평지라고 해 의외”라면서 “주변 지형의 온화한 곡선이 주는 편안함 느낌 탓인지 시수도 잘 나온다”고 말한다.

진남정 사정 전경. [드론촬영=안한진]

연전길은 편백나무 숲을 따라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정겹다. 최호 장군 묘역과 그의 부친·아들·손자 묘역 뒤로 이어지는 숲길은 습기를 머문 탓인지 발끝으로 전해지는 부드러운 감촉이 확연하다. 무겁 뒤편에도 최호 장군 조상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간혹 과녁 뒤 가림막을 넘어 봉분에 화살이 꽂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인근에 거주하며 묘역을 돌보고 있는 종손이 활터로 쫓아 올라오기도 한단다.

무겁에서 본 사정은 맞배지붕 위에 우진각지붕의 한옥 건물이 올라앉아 두 개의 반듯한 사각형이 겹쳐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외부에 노출된 현판은 없고 한옥 구조의 사대와 연결된 콘크리트 건물 벽에 걸려있다. 한눈에 봐도 세월의 더께가 두껍다. 진남정(鎭南亭)이라는 이름은 진포(鎭浦)의 남쪽에 자리한다는 의미다.

진포는 고려 말 최무선 장군이 화기를 이용해 500여척의 왜선을 무찌른 곳이다. 그러나 어느 특정 지역을 지칭하는 지명이 아닌 금강 내륙수로의 하류지역, 즉 임천 고다진에서 서천포에 이르는 지역을 통칭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따라서 금강 하류지역에 위치했던 나루는 모두 진포를 건너는 곳이었다. 지금의 금강하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조선 시대에는 서천포영이 있었으며 수군만호 한 명이 배치됐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군산시는 2008년 진포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내항2길에 해양공원을 개관한 바 있다.

진남정 현판. [사진=한정곤 기자]

현판 글씨는 벽운(碧芸) 유재호(劉載鎬)가 썼다. 한동안 알려진 행적이 없어 화랑가에서는 연대미상 작가로 분류한 적도 있는 그는 1870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18세에 정 8품 문관직인 통사랑(通士郞)을 거쳐 각 도에 두었던 종 5품 관직으로 지방관리의 불법성을 규찰하고 과시(科試)를 맡아보던 북부도사(北部都事·관찰사)가 됐고 1905년에는 정 6품 문관직인 승훈랑(承訓郞)에 올랐다. 1910년 낙향해 전북 익산군 춘포면 오산리에 살았으며 1953년 12월 사망했다. 중국의 서예가인 하소기(何紹基) 행서를 잘 썼던 것으로 알려지며 안진경 해서와 악비의 초서를 기초로 독특한 서체를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진남정과의 인연은 알려지지 않지만 한때 익산군 춘포면 오산리에 살았던 소진우와 전국을 떠돌며 글씨를 썼던 것으로 알려져 관련이 있지 않나 추정된다. 남원 대복사 극락전 현판과 익산 함벽정(涵碧亭) 정자 안에 걸린 편액도 그의 글씨다.

하늘에서 본 무겁 방향의 진남정. [드론촬영=안한진]

◇ 현판 뒷면에서 발견된 남양정의 실체
진남정 현판 뒷면에는 아직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남양정(南陽亭)’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사원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오식도 임시사정으로 이전한 1년 뒤인 2004년 월명산 옛 사정에서 현판과 편액을 챙겨 먼지를 털어내던 중 뒷면에서 같은 글씨체의 남양정이라는 글씨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남양정이라는 활터를 기억하는 이들이 없어 진남정의 옛 이름 아니었겠느냐는 해석부터 혼용해 썼을 것이라는 주장, 또 다른 활터였을 것이라는 주장까지 보는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남양정은 조선일보 기사에서만 두 건이 확인된다. 1923년 6월 17일자 ‘궁술 편사 후보, 군산 남양사정과 논산 덕유사정의 결승전 결과’라는 제목의 기사와 1924년 5월 26일자 ‘궁술시합회 개최, 군산남양정 주최로’라는 제목의 기사다. 덕유정과 편사대회 결승전을 치렀고 궁술대회까지 개최했다는 기사를 통해 실존했던 활터임은 분명하다.

반면 이들 기사가 게재된 1924년 5월 이전까지 진남정이라는 활터가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1921년 진남정이 개정했다는 사실이 더 의심을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진남정은 1934년 4월26일자 매일신보에 처음 등장한다. ‘진남정역원취임식(鎭南亭役員就任式)’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공석이었던 사백에 문종구 씨가 취임했다는 내용이다. 이후 남양정은 사라진다. 다시 말하면 남양정이었던 활터가 진남정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에 더 무게가 실리는 대목이다. 이는 1935년 가을 작성된 <진남정기(鎭南亭記)>를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완산 이명상이 쓴 <진남정기> 편액. [사진=한정곤 기자]

"옛날에 사람을 가르치는 법은 그 뜻이 깊었다. 만물이 생겨나고 번식하여 이미 많아지면 비교해 헤아리는 마음이 없을 수 없고, 이미 비교해 헤아리면 다투는 일이 없을 수 없다. 이 때문에 훌륭한 군왕께서 이 점을 염려하시어 향음주(鄕飮酒)의 예(禮)를 만들어 읍양(揖讓)하는 뜻을 기르게 하셨고 향사(鄕射)의 예를 만들어 궤우(詭遇)하는 요행심을 막으셨다. 그렇다면 활쏘기가 어찌 단지 전쟁터에서 쓰이는 것일 뿐이겠는가.

옛사람들은 질박해 그들에 대해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만으로도 사방에 위엄을 떨쳤는데 지금은 장총과 대포로 요란하게 공격하고 사납게 쏘아서 포연이 자욱하고 탄환이 빗발쳐 하늘과 땅이 희미하도록 하니 비록 유기(由基)의 활솜씨와 복고(僕姑) 같은 좋은 화살이 있더라도 손을 쓸 곳이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활 쏘는 것이야말로 제(齊)나라 궁문(宮門)에서 연주하는 피리와 월(越)나라 사람의 장보관(章甫冠)처럼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흥성하면 반드시 쇠퇴함이 있고 궁하면 반드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변의 이치다. 아마도 하늘이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살리고자 하신다면 틀림없이 천하에서 병장기를 녹여 없애고 원시 상태로 궤도를 되돌려서 예(禮)로서 인도하고 풍속으로 읍양하게 할 것이다. 이로써 논한다면 사도(射道)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 장차 머지않아 가까운 장래에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옥산(玉山)은 남쪽 지방의 요새다. 앞으로는 큰 바다와 통해 있고 뒤로는 평평한 육지와 이어져 있어서 하루아침에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방위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지역이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일찍이 힘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근래에 수륙으로 교통해 일이 번잡해져 옛 풍속이 완전히 바뀌어 끝이 없었다. 식견이 있는 자들이 근심하고 탄식해 이를 막을 좋은 대책을 강구한 끝에 단정하고 엄숙한 정곡(正鵠)을 처음 세우게 되었다. 지난 신유년(1921년)에 이 고을 경포(京浦)에 사정(射亭)을 세워 궁술을 익히는 장소로 삼고 진남(鎭南)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무진년(1928)에는 월명산 북쪽으로 사정을 옮겼으니, 이는 대체로 경포가 물가에 가까워 지대가 낮고 좁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월명산 역시 땅이 궁벽해 사람의 흉금을 시원하게 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이듬해(1929년)에 다시 월명산의 남쪽에 터를 잡았으니 지대가 탁 트인 데다가 넓었고 산이 돌고 물이 굽이치는 곳이어서 실로 형승(形勝)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만약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즈음에 하늘이 맑고 날씨가 화창할 때 훌륭한 선비들이 사정에 올라 활을 연 다음 마음을 바르게 하고 짝지어 활을 쏘아서 향사의 옛 법도를 계승한다면 뚜렷하게 덕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아! 천하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때에 이러한 옛 풍속이 아직도 전해짐이 있으니 혹 주역(周易)에서 말한 “크고 좋은 과실이 남아 있는 형상”이 아니겠는가. 평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오늘날에 살면서 옛 것을 행한다면 네모난 구멍과 둥근 촉꽂이처럼 서로 맞지 않는 일을 많이 당하게 될 것이다”고 하는데, 이는 타당한 논의가 아니다.

옛날에 자공(子貢)이 초하루 제사에 양을 제물로 바치는 예를 폐지하려 하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賜 자공)야! 너는 그 양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를 아끼노라” 하셨다. 오늘날 활쏘기를 하는 것은 곡삭(告朔)의 양을 보존하는 뜻이니, 아, 아름답지 아니한가.

사정을 짓는 데 필요한 자금은 실로 여러 사람의 마음과 힘을 합해 마련한 것이다. 액수가 크건 작던 간에 모두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나온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니 어찌 많고 적음을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진남이라고 편액한 것은 옛날의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활이 무기 편제에서 제외된 후 활쏘기가 급격하게 쇠퇴했던 시대 상황을 한탄하고 무기가 아닌 공자가 강조했던 관덕(觀德)의 활쏘기를 역설하는 내용으로 진남정의 개정 취지와 월명산으로 옮겨온 과정이 상세히 적혀 있다. 특히 ‘지난 신유년(1921년)에 이 고을 경포에 사정을 세워 궁술을 익히는 장소로 삼고 진남이라는 편액을 걸었다’는 부분과 ‘진남이라고 편액한 것은 옛날의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는 마지막 문장이 눈길을 끈다. 즉 사용하지 않은 진남을 다시 사정 이름으로 쓴다는 것이다. 1921년 진남정으로 개정한 이후 1923년 조선일보 기사에서 확인되듯 어떤 연유에서인지 한동안 남양정으로 불렸지만 다시 개정 당시의 진남정으로 사용한다는 설명이다.

하늘에서 본 사정 방향의 진남정. [드론촬영=안한진]

◇ 진남정→남양정→진남정
<진남정기>를 쓴 이는 완산(完山) 이명상(李明翔)이다. 가선대부 전 종정원경(嘉善大夫 前 宗正院卿)이라는 품계까지 적혀있어 그리 낮은 신분이 아니었는데도 생몰연대는 물론 태어난 지역도 알려지지 않는다. 가선대부는 종2품 관직으로 현재의 차관급에 해당하며 종정원은 종실(宗室) 사무와 왕실족보의 수정을 담당했던 관청으로 업무를 관장한 관리를 경이라 한다.

이명상은 『고종실록』에서 모두 다섯 차례 확인된다. 1894년(고종 31년) 12월 지방에 있는 참의 김인식 등을 감하(減下·감원)할 것을 청하는 총리대신의 계에 그의 이름이 포함돼 있고 1894년 9월에는 양호도순무영 참모사(兩湖都巡撫營參謀士)에 단독 추천된다. 또한 1895년 6월 회계원 검사사 장으로 임명하겠다는 궁내부 대신 서리의 계와 10월 의원면직하겠다는 궁내부 대신의 계, 1898년 6월에는 동래감리 겸 동래부윤(東萊監理兼東萊府尹)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한다는 기록도 있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했던 1894년 양호도순무영 참모사로 임명되면서 충청·전라도에 파견돼 지역사회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최고 군사지휘부의 공식기록물인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에는 예산 신례원 전투에 대한 그의 상세한 보고 내용 등이 수록돼 있다. 이듬해인 1895년에는 의정부(議政府) 주사로 자리를 옮겨 왕명으로 백남규(白南奎)와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번역해 간행했다. 『사민필지』는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취임한 호머 헐버트가 집필한 세계의 지리와 문화를 소개하는 내용의 교과서다.

편백나무 숲길을 따라가는 연전길. [사진=한정곤 기자]

조정 관리로 살았던 19세기와 달리 이명상은 20세기 들어 전혀 다른 삶의 행적을 보여준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제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전북 옥구 출신의 임병찬(林炳瓚)이 1914년 서울에서 독립의군부를 전국 조직으로 확대시킨 대한독립의군부를 창설할 당시 이인순(李寅淳) 등과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임병찬은 대한제국기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등을 역임했고 스승 최익현과 의병활동을 했지만 동학농민혁명 때 어릴 적 동네친구로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던 김개남을 전주감영에 밀고한 사람으로 더 유명하다.

이후 1920~1921년에는 조선고대사연구회와 한문전문학교 설립을 위한 운동에 나섰고 유교대동회가 발행한 ‘유교대동론’의 편집부장으로도 활동했다. 그의 마지막 행적은 1938년 조선 후기 문인 강백(姜栢)의 시가(詩歌)와 산문을 엮어 간행한 『우곡집(愚谷集)』 권두에 쓴 서문(序文)으로 확인된다. 말년으로 추정되는 1920년대 중반부터 이후 10여 년 동안은 이처럼 서책의 서문과 여러 누정의 정기(亭記)·비문(碑文) 등을 쓰며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1925년 여러 성씨의 계보를 종합정리해 목판본으로 간행한 20권 20책의 『청구씨보(靑邱氏譜)』 서문을 비롯해 조선 말기 문신 안창렬(安昌烈)의 문집으로 표훈사 내용과 금강산을 유람한 ‘해산기행록’이 수록돼 있는 1931년 『동려문집(東旅文集)』 서문이 그의 글이다. 이외에 거창 도계정기(道溪亭記), 나주 소요정중수기(逍遙亭重修記), 남원 퇴수정기(退修亭記), 나주 정절공(貞節公) 신도비, 삼척 경주김씨 열녀문 비문, 선성군(宣城君)의 묘비문에도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진남정 사원 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진남정기>도 이들 정기·비문과 같이 이명상이 말년 지인들의 부탁을 받고 쓴 것으로 추정된다.

송파 한상계가 작성한 <사계서> 편액. [사진=한정곤 기자]

◇ 100년 역사 전하는 <사계서>
<진남정기>에 앞서 창건과 함께 작성된 <사계서(射契序)> 편액은 진남정의 100년 역사를 온전히 전해준다.

“활쏘기의 뜻은 오래됐다. 삼대(三代:하·은·주) 시절에 선비들은 모두 활쏘기를 배우고 나서 나아가 예를 따르고 덕을 헤아렸다. 반드시 뜻이 바르고 몸이 곧아서 중도에 드는 자라야 인재에 선발될 수 있었다. 그래서 육예(六藝)를 익힌 선비들은 빈(賓)으로 인정받지 않음이 없었으니 후에 선비를 골라 뽑는 제도는 대략 그 오랜 뜻에서 본뜬 것이었다.

말세로 내려감에 따라 활쏘기의 도리가 끝내 폐해져 익혀지지 않았으니 활을 잡는다는 것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깃들 곳도 없이 그 활달한 기운과 답답한 뜻을 펼 곳이 없었으며 세상의 도리마저 몰락하니 실로 식자들의 한이 됐다. 그 사이에도 무예는 점차 진작되고 곳곳에서 서로 계승하고 인도해 호응하는 일들이 있었다. 대저 하나의 예(藝)에는 흥망에는 또한 시절에 달려있는 것이리라.

내가 여기에 여러 해 머무는 동안 교유를 맺음이 자못 넓어 뜻을 같이 해 서로 구하는 자들이 무릇 몇몇 사람이었다. 우선 그들과 더불어 짝을 이루어 활을 잡으니 그 모습이 가히 크게 볼만한 것이었다. 삼가 생각해 보니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덕으로서 행하는 것은 활쏘기 만한 것이 없다” 했으니 이 때문에 이기고도 교만하지 않으며 졌다고 해 결과에 위축되지 않는다. 무릇 요즘의 무사라 하는 자들은 지는 것을 배척하는 무리다.

대저 혹시 취해 떠들거나 기분에 따라 드러나게 뽐내는 것은 정도에 지나친 것이니 습사하지 못하게 영을 내리는 것이 법도다. 모름지기 이러한 풍속을 가꾸어 진퇴주선(進退周旋)의 예로써 기운을 펴고 용모를 정중히 한다면 군자다운 무인이라 할 것이다. 옛사람이 이른바 “두 사람이 승부를 겨룸에 덕을 기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했으니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렇다면 활쏘기를 옛날의 선비를 취해 쓰는 제도로 삼는 것까지야 비록 감히 바랄 수 없지만 자신을 바루어 덕을 기르는 선비정신을 해쳐서는 안될 것이니 가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약간의 재물을 마련해 사정을 짓고 승경을 감상할 채비를 마련하는 데 쓰자는 의논을 모았다. 이에 일이 갖추어졌다. 여러 군자들은 나를 계장으로 추대했으니 이 용렬한 사람은 마음에 새겨 진실로 부족한 대로 계승하니 만사를 성취하는 데에 이르게 하고자 하면 일의 마땅함을 헤아리고 충심을 다해 도와 나갈 것이다. 이에 서문을 쓰노라.”

1921년 5월 하순 송파(松波) 한상계(韓相契)가 작성한 글로 이명상의 <진남정기>와 달리 진남정 사원이 직접 썼다. 그는 생몰연대나 태어난 곳 등은 확인되지 않지만 군산 개복동에 거주했고 개성에 있는 조선 제2대 임금 정종(定宗)과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능을 지키는 벼슬인 종9품 후릉참봉(厚陵參奉)을 지낸 것으로 『고종실록』(1905년 8월)은 전한다. 특히 교육 분야에 관심을 갖고 거금을 내놓으며 학교 설립에 적극성을 보였다. 1920년대 일제의 식민지 우민화 교육에 맞서 조만식·한용운 등이 주도했던 민립대학설립운동에 군산을 대표한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26년 군산의 사설교육기관인 한송의숙과 광동의숙을 병합해 설립한 무산 아동교육기관인 군산학원 추진회 임원으로도 활동했다.

한상계는 이종사촌들과 재산싸움을 벌일 만큼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상당한 재력가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1909년 9월 14일부터 무려 6일 동안 대한매일신보에 자신의 토지를 빼앗으려 했던 이종사촌 두 명의 위조 서류를 적발했다면서 다른 사람들도 이들의 속임수에 당하지 말 것을 호소하는 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다.

사대에서 본 진남정 과녁. [사진=한정곤 기자]<br>
사대에서 본 진남정 과녁. [사진=한정곤 기자]

◇ 창건과 함께 조직된 사계…600여회 넘는 월례수련대회
진남정 <사계서>는 창건과 함께 사계(射契)가 조직됐음을 알려준다. 다만 계원들의 명단을 적은 좌목(座目) 등 관련 자료가 더 이상 없다는 점이 아쉽다. 선생안(先生案)이나 사안(射案) 혹은 좌목은 없지만 사백과 임원명단이 기록된 편액에서는 <사계서>를 쓴 한상계 외에 계장(稧長)으로 다른 사람 이름이 추가로 확인되지 않는다. 종신직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이후 후임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에서 사계가 중도 와해됐거나 존속했다면 사백이나 행정사무를 총괄했던 집강(執綱) 등이 역할을 대신했을 것으로 해석된다.

진남정 사계의 흔적은 최근 팬더믹으로 인한 집합금지조치 이전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달 개최했던 월례수련대회를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 안수근 사백은 “다른 활터들이 부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월례수련대회를 진남정은 매달 한 차례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면서 “기록으로 이어지는 횟수만도 현재 600여회가 넘는다”고 말한다. 단순계산으로도 50년이 넘는다. 사계에서 비롯된 매월 음력 초하루 모임인 황학정 삭회(朔會)가 1월·8월·12월을 제외하고 현재 500여회를 넘겼으니 얼추 비슷하다. 아마 황학정와 같이 한국전쟁으로 기록이 유실돼 이후부터 셈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평지에서 본 진남정 사정. [드론촬영=안한진]<br>
평지에서 본 진남정 사정. [드론촬영=안한진]

현재 진남정에는 60여명의 사원이 활쏘기를 하고 있다. 활터를 이끌어갈 사원이 없어 폐정 위기까지 내몰렸던 아픈 경험은 진남정의 새로운 100년 역사에 반면교사로 오히려 자양분이 되고 있다. 특히 40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지난 100년 동안 구사(舊射)들이 일군 역사를 이어 더 나은 100년을 꿈꿀 수 있는 튼튼한 토대다. <진남정기>를 쓴 완산 이명상이 나주 <소요정중수기> 말미에 남겨놓은 시(詩)에서 진남정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본다.

白龍之佳麗兮 백룡의 아름다움이여
儼鸞鳳之舞翔 의젓한 난봉은 춤추며 날도다
榮江之澄碧兮 영산강 맑고 푸름이여
與天地而久長 천지와 함께 영원하리라
杖屨之所臨兮 발길이 임하시던 바여
尙草木之有彩 아직도 초목에 광채가 있도다
遺澤之崇深兮 남기신 은택 높고 깊음이여
僾風韻之不忘 아련한 풍운 잊지 못하리라
顧僻僻其何妨兮 궁벽한들 무슨 상관
倣必□於蕭園 쓸쓸한 동산에 □함 본받으리
垂遺範而勿替兮 유범을 전해 변함없음이여
擬嵌存於靈光 영광을 아로새겨 보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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