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음(漢陰) 이덕형② 호(號)처럼 한음(漢陰)에 묻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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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漢陰) 이덕형② 호(號)처럼 한음(漢陰)에 묻히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1.05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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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㉓
▲ 수종사에서 바라본 두물머리.

[한정주=역사평론가] 이덕형이 말년에 거처로 삼았던 사제촌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운길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운길산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여 한양을 향해 흘러가는 두물머리의 전경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명소였다. 그래서 이덕형은 운길산에 자주 올랐다.

한양을 향해 쉼 없이 흐르는 한강의 물결이 사제촌에 물러나 있지만 나라와 임금의 앞날을 염려해 항상 궁궐로 향해 가는 자신의 마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덕형은 두물머리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운길산의 수종사를 아꼈다. 이 고즈넉한 옛 산길에 2010년 6월 이덕형의 후손들인 ‘광주이씨한음상공파종회(廣州李氏漢陰相公派宗會)’에서 ‘운길산 수종사와 한음 이덕형 선생’이라 제목 붙인 표지판을 세웠다. 그리고 운길산 수종사와 관련한 이덕형의 행적을 자세하게 기록해놓았다.

“한음 이덕형(1561∼1613) 선생은 산수가 빼어난 운길산을 사랑하시어 중앙정치의 와중에도 여가를 내어 사제촌에서 수종사로 이어지는 돌길을 따라 자주 걸으셨다. 수종사의 주지가 되어 사제촌의 한음선생을 인사차 찾아 온 덕인(德仁) 스님에게 준 시에서 선생과 스님과 사제촌을 둘러싼 겨울 풍광이 그대로 들어난다.

‘운길산 스님이 사립문을 두드리네 / 앞 개울 얼어 붙고 온 산은 백설인데 / 만첩청산에 상련대(雙練帶) 매었네 / 늘그막의 한가로움 누려봄 즉 하련만.’

선생은 7년여의 임진왜란을 수습하는데 큰 공훈을 세웠으나 극심한 정쟁에서 오는 국정의 혼미에 몹시 상심하셨다. 봄날이 가는 어느 초겨울 선생은 이곳 수종사를 찾아 주지 스님에게 우국충정에서 오는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드러내는 시를 지어 주셨다.

‘산들바람 일고 옅은 구름비는 개었건만 / 사립문 향하는 걸음걸이 다시금 더디네 / 구십일의 봄날을 시름 속에 보내어 / 운길산 꽃구경은 시기를 또 놓쳤구나.’

오른편 사제촌(송촌리) 한음마을에는 500년 조선역사상 최연소로 31세에 대제학에 오르고 42세에 영의정에 오르신 선생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후 삶을 마감하신 별서(別墅)터 및 하마석(下馬石) 등의 유적이 그대로 있어 아련한 선생의 발자취를 가늠해볼 수 있다.”

▲ 눈에 덮힌 수종사. <수종사 홈페이지>

그러나 이덕형이 사제촌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그에 대한 참소는 그치지 않았다. 결국 1613년 9월 이덕형은 삭탈관직(削奪官職)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때부터 이덕형은 나라와 임금 그리고 백성에 대한 걱정 때문에 식음을 전폐한 채 오직 차디찬 술만 마시다가 삭탈관직당한 지 불과 한 달 만인 10월9일 나이 53세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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