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尤庵) 송시열① 보수의 세기…주자학의 광기(狂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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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尤庵) 송시열① 보수의 세기…주자학의 광기(狂氣)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1.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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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㉔
▲ 송시열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정주=역사평론가] 조선의 유학사를 말할 때 대개 율곡 이이의 학통은 사계(沙溪) 김장생→신독재(愼獨齋) 김집→동춘당(同春堂) 송준길→우암(尤庵) 송시열로 전승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학설이 심각한 역사 왜곡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율곡은 ‘경장(更張)’과 ‘안민(安民)’을 정치의 최우선적 가치로 여긴 개혁적 성향의 성리학자였던 반면 김장생 이후 김집과 송시열에 이르기까지 서인(특히 노론 계열) 세력은 ‘신분 질서’와 ‘춘추 의리’를 정치와 사상의 최고 가치로 삼은 보수적 성향의 주자학자였기 때문이다.

율곡의 성리학 사상과 정치철학이 집약돼 있는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살펴보면 그는 시무(時務)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큰 요체를 간추려 보면 창업(創業)과 수성(守城)과 경장(更張)의 세 가지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조선을 지은 지 이미 오래되어 재목이 낡아서 곧 썩어 무너지려 하는 집에 비유하면서 폐정(弊政)과 낡은 인습 그리고 묵은 폐단을 바로잡아 고치는 경장, 곧 ‘개혁’이 그 시대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또한 율곡은 임금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지하기 때문에 왕도정치(王道政治)란 곧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생업을 하늘로 삼으니 만약 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을 잃게 되면 나라는 의지할 데를 잃어버리게 되므로 ‘안민’이야말로 왕도정치의 근본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율곡에게 정치란 백성의 노역(勞役)을 덜어주고 백성의 생업을 충족해 주어서 백성을 편안하고 이롭게 해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율곡의 수제자라고 자처한 김장생은 이러한 율곡의 개혁적 성향과 민본주의를 전승하기보다는 성리학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예학(禮學)’을 일생동안 연구하고 후학들에게 전해준 예학의 대가(大家)였다.

더욱이 김장생은 율곡이 아닌 구봉(龜峯) 송익필에게 예학(禮學)을 배웠다. 김장생의 문집(文集)인 『사계전서(沙溪全書)』의 ‘연보(年譜)’를 보면 그는 나이 20세인 1567년(명종 22년)에 율곡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이 ‘연보’에는 김장생이 이보다 7년 전인 나이 13세 때 이미 송익필에게 나아가 종학(從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율곡을 스승으로 모시기 훨씬 전부터 송익필을 스승으로 섬겼다는 얘기다.

송익필은 율곡과 우계 성혼 등과 교우한 사림의 인사였는데 성리학 중에서도 특히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그런데 그는 신분상 약점이 있었다. 서출(庶出)이었기 때문이다. 송익필은 신분은 물론이고 사상에 있어서도 적통(嫡統)을 무엇보다 중요시했던 서인이 종조(宗祖)로 삼을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김장생 이하 송시열에 이르기까지 서인 노론 계열은 송익필의 보수적 성향을 전승했으면서도 율곡의 권위를 빌어 자신들의 권력에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입혔다고 하겠다.

어쨌든 송익필과 김장생에 의해 일가를 형성한 예학이란 신분 질서에 따라 지켜야 할 예법과 예절 혹은 규범과 관습 일체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학문을 말한다.

▲ 사계 김장생이 중국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중심으로 엮은 『가례집람(家禮輯覽)』. 예서(禮書)의 원류로 예학(禮學)에 대한 기본 경전이다.

조선의 신분 질서는 모두가 알다시피 왕을 정점으로 한 ‘사(士)·농(農)·공(工)·상(商)’의 위계(位階)에 더해 인간이 아닌 재물로 취급당한 노비로 구성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 예학은 제왕은 제왕답게, 사대부는 사대부답게, 농민은 농민답게, 공인은 공인답게, 상인은 상인답게, 노비는 노비답게 살아야 한다는 학설일 따름이다.

율곡이 개혁을 시대적 과제로 삼고 안민을 ‘바뀌지 않는 진리’라고 보았던 것처럼 김장생은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를 ‘하늘이 부여한 진리’로 여겨 조선이 개국 초기부터 유지해온 기존 체제는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가르침의 연장선상에서 송시열은 예(禮)를 정치의 근본이라고 주장했다. 즉 그는 세상의 모든 국가는 예(禮)가 위에서 다스려지면 다스려지고 예(禮)가 어지러우면 나라 또한 어지러워진다고 보았다.

또한 예(禮)를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잣대로 삼아 임금이 예(禮)에 조금이라도 밝지 못한다면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예(禮)를 바로 세우는 일을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그래서 “임금이 해야 할 일이란 오직 하늘이 부여한 (신분) 질서와 명령을 이행하는 데 불과하다”는 극단적인 언사까지 서슴없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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