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尤庵) 송시열② 주자학의 수호신…송자(宋子)로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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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尤庵) 송시열② 주자학의 수호신…송자(宋子)로 살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1.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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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㉔
▲ 공자(왼쪽)와 주자의 초상.

[한정주=역사평론가] 송시열은 1607년(선조 40년)에 태어나 1689년(숙종 15년)에 사망했다. 그는 조선의 유학자 중 유일하게 공자나 맹자 그리고 주자와 같은 반열인 ‘송자(宋子)’라는 극존칭을 얻은 인물이다.

조선의 주자라는 의미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송자라고 불린 송시열은 평생 자신이 주자학의 적통(嫡統)을 계승했다고 자부하면서 주자학의 수호신으로 살았다.

나이 24세(1628년) 때 김장생에게 취학해 10년 동안 주자학과 예학을 배운 송시열은 김장생 사후 그의 아들인 김집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그는 김장생과 김집의 학통과 당파를 이은 서인 노론 계열의 정신적 지주이자 정치적 수장으로 일생을 보냈다.

특히 병자호란 이후 북벌(北伐)을 국시(國是)로 내건 효종(孝宗)이 즉위하면서 반청척화론(反淸斥和論)을 주창한 송시열은 조정의 중심인물로 급부상한다. 오랑캐인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게 당한 치욕을 갚고 중화의 뿌리인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갚는다는 요지의 반청척화론은 주자학의 정통성과 권위를 지키고자 한 송시열의 학문세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공자와 주자를 성인(聖人)으로 여겨 종교적 숭배의 대상처럼 섬긴 송시열에게 명나라, 곧 한족(漢族)의 중국은 공자와 주자의 나라 그 자체였다.

따라서 명나라는 사대(事大)의 예(禮)로 섬겨야 할 나라였고 사상의 조국(祖國)이었다. 그런 명나라를 멸망시킨 여진족의 청나라는 성인의 도통(道統)을 끊어버리고 사상의 조국을 짓밟은 야만적인 오랑캐에 불과했다.

▲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전투도.

송시열은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공자와 주자의 도통(道統)과 정통성은 조선의 주자학으로 넘어왔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의 문하였던 서인 노론 세력은 그 도통과 정통성의 최고 정점에 조선의 주자인 송자(宋子), 곧 송시열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유학과 성리학의 도통을 공자→주자→송자로 여길 정도였으니 그들이 얼마만큼 송시열을 주자학의 권위와 정통성을 지키는 큰 스승으로 여겼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송시열의 반청척화론과 북벌사상은 공자와 주자의 나라인 명나라에 대한 춘추의리(春秋義理: 중화를 숭상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를 지키는 것이자 명나라의 멸망으로 위기에 내몰린 주자학의 도통과 정통성을 지켜나가겠다는 시대착오적인 사고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춘추의리를 지키고 주자학의 도통과 정통성을 잇겠다고 자임한 송시열이 주자의 절대적인 권위에 기대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부터 조선의 정치와 학문 및 사상은 크게 경색되고 공포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송시열이 보기에 자신과 다른 정치적 주장을 하는 당파들은 모두 춘추의리를 배반한 친(親) 오랑캐 세력이고 자신과 다른 학설을 주장하고 경전 해석을 하는 유학자들은 모두 사문난적(斯文亂賊)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과 학설에 문제제기를 하거나 도전하는 그 어떤 행동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심지어 주자가 모든 학문의 이치를 이미 밝혀 놓았다고 하면서 사서삼경(四書三經)과 같은 유학의 원(原) 경전에 주자와 다른 학설과 의견을 내세우면 학문을 더럽힌 도적이나 역적으로 몰아 벽지로 내쫓거나 귀양 보내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특히 그는 매우 과격하고 전투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주자학을 옹호했기 때문에 송시열 생전에 조정과 사림은 그 어느 시대보다 격렬한 정치투쟁과 사상논쟁에 휩싸여야 했다.

‘우암(尤庵)’이라는 송시열의 호(號) 역시 이러한 전투적이고 비타협적이었던 사상논쟁의 과정에서 탄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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