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정(雅亭)…이덕무의 시는 우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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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정(雅亭)…이덕무의 시는 우아하다.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1.12.27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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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86) 매미를 읊어 여러 동료에게 보여주다

玄蟬淸砭耳 가을 매미 소리 맑아 귓전에 요란하니
似督汗靑期 사서(史書)의 기한 재촉하는 듯하네
流韻澹風好 맑은 바람 흐르는 소리 마냥 좋은데
翳形高樹宜 높이 솟은 나무 그 모습 감추었네

渾身都是潔 온몸 마디마디 맵시도 깨끗하니
微品一何奇 한낱 미물(微物)이 어찌 그리 기이한가!
永日無停響 온종일 울음소리 그치지 않으니
憐渠性不移 변함없는 성품 사랑스럽네. (재번역)
『아정유고 4』

[한정주=고전연구가] 이덕무의 시 세계는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전반기가 규장각 검서관이 되기 이전이라면 후반기는 규장각 검서관이 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나이로 따지면 39세 이전과 이후로 나뉘고 신분으로 따지면 재야 지식인과 관료 지식인으로 나뉜다.

또한 전반기의 시 세계가 ‘기궤첨신(奇詭尖新)하다’면 후반기는 ‘우아(優雅)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이덕무의 시 세계를 가리켜서 ‘우아하다’고 비평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정조대왕이었다. 이덕무는 정조대왕의 비평에 감읍하여 자신의 마지막 호를 ‘아정(雅亭)’이라고 지었다.

이덕무는 당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구중궁궐에서 내린 한 글자의 포상이 미천한 신하의 평생을 결단할 수 있다.”

그의 사후 편찬한 유고 시집의 제목이 『아정유고』가 된 까닭 역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덕무의 시 세계가 이렇게 변화한 까닭은 무엇일까? 환경과 처지의 변화 때문이다. 벼슬하지 않은 선비의 신분으로 어울려 시를 지은 사람과 벼슬한 이후 궁궐에서 어울려 시를 지은 사람은 분명 달랐다. 궁궐에서 임금이나 벼슬아치와 어울려 짓는 시는 민간의 벼슬하지 않은 신분으로 시를 지을 때만큼 개성적이고 혁신적이며 자유롭고 활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기궤첨신한 시풍과 우아한 시풍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이덕무 시의 참모습일까. 아마도 두 가지 다 이덕무의 참모습일 것이다. 이 시대는 시대 차원에서든 사회 차원에서든 개인 차원에서든 ‘옛것과 새로운 것’ 또는 ‘보수와 진보’가 공존했던 시대였다. 비록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해도 낡고 오래된 것의 굴레와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 이 시대 지식인들의 한계였다.

이덕무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하지만 기궤첨신하든 혹은 우아하든 이덕무의 시에 담긴 뜻과 기운만은 큰 변화가 없었다. 담백하고 욕심 없는 삶의 추구가 바로 그것이다.

벼슬에 나간 이후 ‘매미’를 읊어 자신의 뜻과 기운을 보여준 이 시 역시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비록 환경이 다르고 처지가 변했다고 해도 매미처럼 향기롭게 살겠다는 자신의 뜻과 기운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선언이다.

실제 이덕무는 벼슬에 나간 이후에도 자신의 뜻과 기운을 굳건히 지키며 쓸쓸한 오두막집에 살면서 빈천을 감내할망정 끝끝내 권력을 쫓아다니거나 부귀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필자는 만약 이덕무의 ‘기궤첨신 시 세계’와 ‘우아한 시 세계’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기꺼이 ‘기궤첨신한 시 세계’를 선택할 것이다. ‘기궤첨신한 시의 세계’는 비록 조잡하고 거칠더라도 이덕무의 영혼이 살아 있는 시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우아한 시의 세계’는 비록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해도 전형에 맞춰 짓고 인위적으로 꾸민 까닭에 이덕무의 영혼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덕무는 규장각 검서관이 된 이후 한 가지는 얻고 한 가지는 잃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얻은 것이 18세기 조선의 문치를 빛낸 공적이라면 잃은 것은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시풍이다.

필자는 이덕무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안타깝고 아쉽다. 전자는 이덕무가 아니어도 누군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후자는 이덕무가 아니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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