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빵은 부·갈색빵은 빈곤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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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빵은 부·갈색빵은 빈곤의 상징”
  • 심양우 기자
  • 승인 2015.01.13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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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뱅 보쟁의 ‘체스판이 있는 정물’(1630년).

화가 뤼뱅 보쟁이 1630년에 그린 그림 ‘체스판이 있는 정물’에는 그 시대의 사치품이 묘사되어 있다. 그림 가운데에는 오븐에서 핀 꽃과도 같은 최고급 흰 밀가루로 만든 빵이 놓여 있다.

반면 르냉 형제의 1642년 그림 ‘행복한 가정’에는 가난한 소작농들이 커다란 호밀빵을 가운데 두고 모여 있다.

음식으로서의 빵은 탄수화물이 많고 칼로리가 높은 매우 단순한 음식이다. 하지만 문화적 대상으로서의 빵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찰스 디킨스의 『돔비와 아들』에 한심한 아첨꾼으로 등장하는 미스 톡스는 빵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허세로 가득찬 그녀는 아침식사로 프렌치 롤빵을 롤라 상류층 사람들을 흉내내듯 빵껍질을 벗겨 결국 비웃을 당한다.

16~18세기 유럽의 회화에서는 흰 빵을 부의 상징으로, 갈색 빵을 가난의 상징으로 표현했다.

오늘날 영국이나 미국 가정의 사회적 지위를 빵으로 표현한다면 아마 부유한 집의 식탁에는 껍질이 도톰한 팽 드 캉파뉴(pain de campagne)나 치아바타를, 가난한 집의 식탁에는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규격화된 식빵을 그려 넣을 것이다.

19세기 제분이 산업화되기 전까지 흰 빵은 아주 비싼 음식이었다. 흰 밀가루는 생산과정에서 양이 줄어드는 특성상 높은 수요만큼 충분한 밀을 공급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눈처럼 새하얀’ 빵은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이에 비해 가난한 사람들은 주로 호밀로 만든 크고 단단한 갈색 빵을 먹었다. 영국의 빈자들은 1600년대까지 말에게 먹이로 주는 값싼 말빵을 사먹기도 했다.

빵은 그 시대의 유행, 문화가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따라서 빵의 질과 맛에 대한 평가 또한 시간, 장소, 사회계층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음식역사학자 윌리엄 루벨의 『빵의 지구사』(휴머니스트)는 환경에 따라 변화해 온 빵을 문화인류학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빵의 의미를 찾아간다. 특히 그는 역사 문헌에 등장하는 요리법에 따라 과거의 빵을 직접 만들고 먹어보며 빵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빵의 탄생은 무려 2만2500년 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농경이 발달하기 수천 년 전에 이미 곡식의 채집과 제분이 이루어졌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농경 이전 거주지에서는 갈돌과 갈판이 발견됐으며 보리와 밀로 추정되는 갈돌에 끼인 곡식이 발견되기도 했다.

 

빵은 고대 문명의 경제적·영양적 기반이었다. 세계 최초의 도시 문명지인 우루크(Uruk: 기원전 4500~기원전 3500년경)에는 빵에 관한 문자 기록이 남아 있어 이 시기부터 빵의 역사시대가 열렸음을 알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후기에는 왕궁에 빵을 만드는 방을 두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사람들에게 빵이 제공되었을 정도로 빵을 즐겨 먹었다.

제빵소의 잔해, 제빵소 모형, 빵을 의미하는 상형문자, 그리고 미라와 함께 묻힌 빵 등 이집트에서는 고대 빵 유적과 유물이 많이 발견됐다.

고대의 빵에 관한 자료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 시대의 곡물 종류와 제분․정제․제빵 기술의 수준을 파악하면 당시 빵에 대해 어느 정도 근거 있는 예측을 할 수 있다. 최초의 빵은 예술 작품이었을 수도 있고,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나 연인에게 주는 선물이었을 수도 있다.

현대인들이 먹는 빵과는 모양과 맛이 다를 수는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빵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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