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4곳뿐…서울역사박물관, 최초 조사 보고서 『서울의 대장간』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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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4곳뿐…서울역사박물관, 최초 조사 보고서 『서울의 대장간』 발간
  • 김윤태 기자
  • 승인 2022.01.13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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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장은 2021년 서울미래유산기록 사업의 결과를 담은 『서울의 대장간』 보고서를 지난 12월 발간했다고 13일 밝혔다.

서울미래유산은 근·현대 서울을 배경으로 다수의 시민이 체험하거나 기억하고 있는 사건·인물 또는 이야기가 담긴 유·무형의 문화유산으로 489개가 지정돼 있다.

이 가운데 대장간은 4곳이다. 2013년 은평구 대조동의 불광대장간이 대장간 중 처음으로 미래유산에 지정됐고, 2015년에는 강동구 천호동의 동명대장간, 은평구 수색동의 형제대장간, 동대문구 전농동의 동광대장간이 지정됐다.

서울 대장간의 중심지는 을지로7가다. 조선 시대 야장(冶匠)은 국가의 관리를 받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전국의 야장은 총 710명으로 서울에 424명, 지방에 286명이 있었다. 전체 야장의 약 60%를 차지하는 서울의 야장은 공조(工曹), 군기시(軍器寺), 상의원(尙衣院) 등에 소속돼 무기와 의례에 쓰이는 각종 철물을 생산했다.

조선 후기 군기시를 중심으로 한 무기 생산 역할이 각 군영(軍營)으로 나뉘었다. 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자리한 을지로7가에는 훈련도감 동영이 있었다. 훈련도감에 소속된 140명 등 수많은 야장이 이곳을 무대로 활동했다.

충무로5가는 고개를 따라 길가 좌우로 대장간이 늘어서 있어 ‘풀무재’ 또는 ‘대장고개’라 부르고 한자로는 야현(冶峴)이라 했다. 고종대 풀무재에는 100여개의 대장간이 있었다.

해방 이후 을지로7가 일대는 우리나라 철물산업의 중심지이자 대장장이를 양성하는 교육의 장이었다. 1970년대 말에는 을지로7가에 70여곳의 대장간이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서울운동장 확장과 지하철 공사로 대다수 대장간이 철거됐다. 이 과정에서 을지로7가에 모여 있던 대장간은 점차 주변부로 밀려나 일부는 중구 신당동에 터를 잡았다. 1980년 서울운동장 뒤편 신당동 일대에 20여개의 대장간이 있었지만 현재는 충남대장간과 경남대장간만 남았다.

동명대장간은 서울미래유산 2015-008호로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강남4구의 유일한 대장간이다. 1940년대 초반 강원도 철원에서 1대 강태봉(1927~2002)이 상경해 해방 이전 지금의 장소에서 ‘서울 동쪽에서 제일가는 대장간’이란 뜻에서 동명대장간을 창업해 현재까지 3대째 운영하고 있다. 동명대장간 맞은편은 천호4촉진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으로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불광대장간은 서울미래유산 2013-115호로 은평구 대조동에 있다. 강원도 철원에서 상경한 박경원(1938~)이 을지로7가 대장간에서 일하며 기술을 익혀 1960년대 중반 불광초등학교 개천가에서 손수레를 이용한 이동식 대장간을 연 데서 시작했다. 1973년 불광동 서부시외버스터미널 앞에 불광대장간을 개업했지만 개발로 197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2대째 운영하고 있다. 현재 불광대장간은 주택가에 섬처럼 자리하고 있다.

형제대장간은 서울미래유산 2015-045호로 은평구 수색동 수색역 앞 대로변에 있다. 지방에서 상경한 아버지가 대장간을 열고, 아들이 대를 이어 운영하는 다른 3곳의 대장간과는 달리 이곳은 서울 모래내(남가좌동) 출신 형제가 대장간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가족이 아닌 제자를 양성해 후계를 도모하고 있다.

동광대장간은 서울미래유산 2015-007호다. 경상남도 밀양에서 상경한 이흔집(1949~2020)이 중구 신당동에서 대장간 일을 배워 1978년에 동대문구 용두동에서 대장간을 창업한 것이 시초다. 이후 개발로 인해 동대문구 제기동으로 이전했다가 1996년부터 동대문구 전농동에 자리를 잡고 15년간 운영했다. 하지만 재개발로 2021년 3월 전농동을 떠나 10월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 2020년 갑작스럽게 이흔집이 고인이 되어 아들 이일웅이 대를 잇고 있다.

1966~1984년 서울 면적의 35%에 달하는 구역에서 토지구획 정리사업이 실시됐다. 도시개발로 건설업은 호황을 누렸고, 건설 현장에서 사용하는 도구를 공급하며 서울의 대장간도 성황을 누렸다. 그동안 농기구나 일상생활용품을 주로 생산하던 서울의 대장간은 건설 현장에서 사용하는 도구를 주로 취급하며 도시 제조업으로 특성을 나타내게 됐다.

형제대장간 류상준이 일했던 성북구 장위동 대장간은 1970년대 소 편자와 대갈을 전문으로 만들었다. 가깝게는 동대문구 제기동에서 멀리는 경기도 구리시 교문리까지도 출장을 나가 편자를 박아 주기도 했다. 서울의 소는 대개 수소로 시골의 소와 달리 발에 짚신을 신기지 않고 쇠발굽을 박았다. 도시의 소는 주로 마차와 같은 운송 수단으로 쓰였기 때문에 짚신을 신으면 금방 닳아 쇠발굽을 박았다.

서울의 대장간은 도시인들의 생활환경과 소비문화 변화에 능동적으로 반응해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 내거나 개량함으로써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기존에 제작하던 연장을 여가생활에 적합하도록 작고 가볍게 만들어 휴대성을 높였다. 또 두 가지 이상의 연장을 조합해 복합기능을 가진 연장을 새롭게 만들어 편리성을 극대화했다.

최근에는 캠핑 인구가 늘면서 손도끼나 망치, 장도리 같은 캠핑용 장비를 대장간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텃밭을 가꾸거나 등산, 약초 채취 등의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나타나 전에 없던 새로운 도구가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대장간은 쇠를 가열하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소음과 연기, 먼지를 필연적으로 발생시킨다. 때문에 도시인들의 쾌적한 주거환경을 저해하는 시설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됐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대장간 4곳 가운데 동광대장간(전농동)과 형제대장간은 철도와 대로 사이에 위치해 주민들과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며 민원을 최소화하고 있다.

하지만 서울의 확장은 도시 외곽 한적한 자리에 있던 대장간의 생존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동광대장간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지만 재개발로 2021년 3월 서울을 떠났다. 서울에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읍에 대지를 매입해 건물을 짓고서야 지난해 10월 새로 문을 열 수 있었다.

『서울미래유산기록2, 서울의 대장간』 보고서는 서울역사박물관 누리집에서 열람할 수 있다. 도서 구입은 서울책방에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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