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尤庵) 송시열③ 전투적·비타협적 사상논쟁으로 탄생한 호(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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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尤庵) 송시열③ 전투적·비타협적 사상논쟁으로 탄생한 호(號)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1.1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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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㉔
▲ 안동권씨 문순공파 소유의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 ‘우암송선생칠십사세진(尤庵宋先生七十四歲眞)’이라고 쓴 화제(畵題)가 있어 1680년경의 모습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한정주=역사평론가] 송시열은 원래 자호(自號)를 갖지 않았다. ‘우(尤)’라는 한자는 ‘잘못 혹은 허물’을 뜻한다. 주자학만이 올바른 학문이라는 신념으로 조선을 ‘주자학의 나라’로 바로세우는 일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던 송시열이 무엇 때문에 ‘잘못이나 허물’을 뜻하는 ‘우(尤)’자가 들어간 호를 얻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한 에피소드가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典)』의 ‘연보(年譜)’에 자세하게 나온다.

“(나이 80세) 10월13일. 흥농(興農)에 있는 서재(書齋)로 옮겨 임시로 거처하였다. 흥농은 선생이 처음 도(道)를 강론하였던 곳인데, 학자들이 서당(書堂)을 짓고 능인암(能仁菴)이라 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선생이 수석(水石) 사이에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여기에 남간정사(南澗亭舍)라고 쓴 현판을 달고 다시 주자(朱子)의 남간시(南澗詩) 한 구절을 적어 문 위에 걸었다.

선생은 일찍이 자호(自號)를 갖지 않았다. 언젠가 선생이 창주(滄洲) 김공(金公)과 더불어 시비(是非)를 논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선생은 자신의 의견을 견고하게 지키며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창주가 장난삼아 농담하기를 ‘그대가 이처럼 말이 많으니 말에 허물(尤)이 적다고 할 수 없다. 이에 내가 마땅히 그대의 서실(書室)에 우(尤)라고 이름 붙여야겠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웃으면서 ‘그대가 좋은 말로 내 서실의 이름을 지어 준다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좋지 않은 말로 이름을 지어 주니 별호(別號)는 비록 신재(愼齋: 김집)께서 경계하신 것이지만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라고 답했다. 그 뒤로 창주는 선생에게 편지를 보낼 때 항상 ‘우암(尤庵)’이라고 썼다.

그러나 선생은 일찍이 당(堂)에 현판을 적어 걸지 않았다. 오직 판교의 첨배재(瞻拜齋)와 이곳 조그마한 서재에 호(號)를 걸었을 뿐이다. 이따금 작은 문자(文字)로 남간노부(南澗老父)라고 일컬었다.”

여기에서 송시열에게 ‘우암(尤庵)’이라는 호를 지어준 창주(滄洲) 김공(金公)은 김익희를 말한다. 그는 송시열의 큰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로 성균관 대사성과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오른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문사였다.

송시열보다 3년 연하였던 김익희는 효종 7년인 1656년에 사망했다. 그런데 송시열의 나이 80세 때는 1686년으로 위의 기록과 대조해 보면 무려 30년의 차이가 난다. 따라서 우암은 송시열이 80세 무렵 얻은 호가 아니라 최소한 30여년 이전부터 자의반 타의반으로 불리게 된 호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송시열의 문인 최신(崔愼)은 스승을 모시면서 나눈 대화를 모아 엮은 ‘어록(語錄)-최신(崔愼)의 기록’이라는 글에서 송시열이 ‘우암(尤庵)’이라는 호를 갖게 된 사연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 우암 송시열의 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全)』.

여기에는 송시열이 자발적으로(?) 우암이라는 호를 사용한 최초의 시기가 거제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1679년 나이 73세 무렵이라는 흥미로운 증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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