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부유했지만 가장 불행했던 철강재벌 비트겐슈타인의 드라마틱한 가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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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부유했지만 가장 불행했던 철강재벌 비트겐슈타인의 드라마틱한 가족사
  • 심양우 기자
  • 승인 2015.01.16 0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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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 철강재벌 카를 비트겐슈타인.

오스트리아 철강재벌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1890년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

카를 비트겐슈타인의 넷째 아들 파울은 세계적인 한 손 피아니스트였고 막내아들 루트비히는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유럽 현대사에서 가장 부유하고 예술적이며 천재적인 재능을 과시하던 비트겐슈타인 가문은 가장 불행한 가문이기도 했다.

권위적이고 고집이 센 카를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으로 여덟 명의 자녀가 모두 신경증적 긴장과 내면의 적대감을 안고 살았으며 아들 가운데 세 명은 자살을 했다.

『비트겐슈타인 가문』(필로소픽)은 오스트리아 빈의 문화적·경제적 중심에 있었던 신흥 부르주아의 대표 가문인 비트겐슈타인 가족의 이야기다.

비트겐슈타인 궁전에는 브람스, 말러, 멘델스존, 요하임, 클림트, 부르노 발터 같은 예술계 거장들이 드나들었고,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카를 비트겐슈타인의 자녀들은 음악, 철학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이 가문은 겉보기에는 완벽해 보였지만 권위적인 아버지 카를로 인해 가족들은 항상 긴장 상태에 있었다.

장남인 한스과 둘째 아들인 루돌프는 가업을 잇기를 바라는 아버지와의 갈등 끝에 자살을 선택했고, 이 일로 비트겐슈타인 집안사람들은 항상 비극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카를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파울, 루트비히, 그레틀, 헤르미네, 쿠르트, 헬레네는 아버지의 압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꿈꾸었지만 전쟁이 그들의 꿈을 가로막는다.

예술적 기질을 가졌으면서 경영에도 욕심이 많았던 아버지 카를과는 달리 그의 아들·딸들은 경제활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비트겐슈타인 형제들은 가업을 잇는 대신 음악가·철학자의 길을 걷고자 했으며 예술, 사회봉사, 정치외교에 유산과 시간을 투자했다.

파울은 무료로 학생들에게 피아노 교습을 해주었고, 루트비히는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거액을 기부했으며 그레틀은 각국의 유력 인사들과 친분을 맺고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좋아했다.

막대한 부와 안정적 삶이 보장되었던 비트겐슈타인 집안사람들은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것 또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들 셋이 모두 자원입대해 싸우다가 쿠르트는 전사하고 파울은 한 팔을 잃었으며 루트비히는 포로가 되었다.

헤르미네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으며 헬레네와 그레틀은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기부활동을 벌였다.

또한 파울은 오스트리아 병사들을 위한 군용 외투를 만들어 지급하도록 거액을 기부했고 루트비히 역시 오스트리아군의 신형 박격포 개발을 위한 자금을 기부했다.

보장돼 있던 안위를 포기하고 국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처신은 유럽의 상류계급이 전통적으로 보여주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적 사례였다.

또한 돈을 더 불리려고 욕심 부리기보다 있는 돈을 잘 쓰는 데 더욱 관심이 많았다.

1차 대전 이후 철학자로, 음악가로, 귀부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구가하던 비트겐슈타인 집안에는 암운이 드리운다. 대대로 기독교를 믿었으며 자신들을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비트겐슈타인 가문 사람들은 나치의 뉘른베르크 법안에 의해 순혈유대인으로 분류돼 재산과 생명을 위협받게 된 것이다.

영국으로 귀화한 루트비히와 미국으로 탈출을 감행한 파울은 나치의 손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지만 헤르미네와 헬레네는 비트겐슈타인 궁전에서 나치의 감시 하에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

이들이 살아남을 유일한 길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의 대부분을 나치에 헌납하고 혼혈 신분임을 인정받는 것뿐이었다.

이때부터 막대한 비트겐슈타인가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나치와 비트겐슈타인 가문 형제들 사이에 돈과 목숨을 건 도박이 시작됐다.

 

대서양을 넘나들며 히틀러와 벌였던 재산을 건 줄다리기 과정에서 파울과 형제들 사이의 반목과 불화, 갈등은 극에 달했고 지루하게 이어지던 머니게임이 막을 내린 후에도 형제간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음악과 예술로 하나가 됐던 가문의 영광은 2차 대전의 포화 속에서 주인을 잃은 비트겐슈타인 궁전과 함께 무너져갔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사람들이 남긴 음악과 예술, 철학에 걸친 영향력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클림트가 그린 그레틀의 초상화, 비트겐슈타인 집안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던 거장들의 원본 악보,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에게 파울이 의뢰한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 속에서 『논리철학논고』를 집필했던 루트비히의 철학은 계속 연구되고 있다.

이 책은 시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파란만장한 삶을 일기, 편지, 기록, 신문, 인터뷰 등의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극적으로 묘사된 대하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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