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尤庵) 송시열④ 조선 몰락 초석 다진 보수적 이데올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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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尤庵) 송시열④ 조선 몰락 초석 다진 보수적 이데올로그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1.19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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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㉔
▲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의 송시열 묘. 원내는 송시열 초상.

[한정주=역사평론가] 송시열의 나이 82세가 되는 1688년 10월 28일 숙종은 그토록 바라던 첫 아들을 얻었다. 장희빈의 소생으로 훗날 경종(景宗)이 되는 이다.

당시 송시열은 낙향해 주자(朱子)가 운곡의 남간에 거처한 뜻을 기리기 위해 이름붙인 남간정사(南澗精舍)에 은거한 채 ‘조선의 주자’로 군림하면서 임금에 버금가는 권위와 위세를 누리고 있었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집권 세력도 송시열의 문하생이자 추종자들인 서인이었다.

그런데 숙종은 서인의 집권 세력이 어떻게 손을 써볼 틈도 주지 않고 남인의 비호를 받는 장희빈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정호(定號)하고 종묘(宗廟)에 고하는 절차까지 일사천리로 마무리해버렸다.

남인이 재집권할 위기에 처하자 송시열은 마침내 ‘원자의 작위와 정호’ 그리고 ‘종묘 고묘’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이 상소문은 오히려 숙종의 분노를 사 집권 세력이 다시 남인으로 바뀌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불렀다.

숙종은 기사환국 직전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 당사자라는 죄목을 물어 송시열을 제주도 유배형에 처했다. 1689년 2월 11일 유배지인 제주도로 가는 도중에 송시열은 스승 김장생의 묘소가 있던 고정(高井: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이르러 한 편의 글을 적어 스승의 묘소에 바쳤다.

여기에서 송시열은 ‘주자학의 수호신’으로 살았던 자신의 일생을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항상 ‘주자가 아니었다면 공자의 도(道)가 밝아지지 않았다. 공자의 도가 밝아지지 않았다면 후세에 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소자(小子)는 오직 그 말씀을 깊이 귀에 익히고 가슴에 새겨서 ‘비록 성인이 다시 나온다고 해도 그 말씀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송자대전』, ‘사계선생의 묘에 고한 글(告沙溪先生墓文)’

송시열이 제주도에 도착해 귀양살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문하생과 추종자인 서인 세력이 조정에서 쫓겨나고 남인이 대거 관직에 중용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그리고 숙종은 국문(鞠問)을 해 죄의 실상을 낱낱이 묻겠다면서 송시열을 한양으로 압송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한양으로 발길을 재촉하던 송시열은 1689년 6월7일 전라도 정읍에 당도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뜻밖에도 사약이 도착했다. 결국 송시열은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았다. 그때 송시열의 나이 8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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