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白湖) 윤휴① 스승 없이 자득(自得)·체득(體得)한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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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白湖) 윤휴① 스승 없이 자득(自得)·체득(體得)한 학문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1.22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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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㉕
▲ 백호(白湖) 윤휴의 초상.

[한정주=역사평론가] 윤휴는 아버지 윤효전이 경주부윤으로 재임하던 1617년 10월 경주에서 태어났다. 송시열보다 10년 연하다.

윤휴의 문집인 『백호전서(白湖全書)』의 ‘연보(年譜)’를 보면 윤휴와 송시열은 처음 좋은 인연으로 만나 두터운 교제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7년(나이 21세) 윤휴는 속리산 복천사 앞에서 송시열을 만났는데, 이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나라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로 손을 부여잡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보다 1년 전인 1636년 첫 만남을 가졌던 듯하다. ‘연보’의 1638년 기록을 보면 애초에 윤휴가 삼산(三山)에 있을 때 송시열이 윤휴의 명성을 듣고 직접 찾아와서 교유하기를 청했다는 내용이 보이기 때문이다.

윤휴가 충북 보은(報恩) 삼산의 외가댁에 머문 때는 나이 11∼12세, 15세, 20세 때였다. 송시열이 윤휴의 명성을 듣고 찾아가 담화를 나눈 후 높은 학문에 탄복했다고 한 것으로 볼 때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시기는 윤휴의 나이 20세 때인 1636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윤휴를 만나고 돌아온 송시열은 동문(同門)의 대학자인 송준길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삼산에 가서 윤휴를 만나 그와 더불어 3일 동안 학문을 논하였다. 그런데 우리들이 30년 독서한 것이 진실로 가소로웠다”고 하며 크게 탄식했다고 한다.

어쨌든 속리산 복천사 앞에서 송시열을 만나고 청나라에 항복한 나라의 운명 앞에 비통한 심정을 금할 수 없어 크게 통곡하고 집으로 돌아온 윤휴는 다시는 과거(科擧)에 응시하지 않고 문을 닫은 채 독서에만 몰두했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홀로 남은 모친을 모신 윤휴는 속리산에서 돌아온 다음해(1638년) 나이 22세 때 공주(公州) 유천(柳川)으로 이사하였다.

송시열이 감탄할 정도로 유학의 경서(經書)에 관한 풍부한 지식과 높은 식견을 드러낸 윤휴는 일찍부터 당시 성리학자(주자학자)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긴 『성리대전(性理大典)』, 『주자대전(朱子大典)』, 『근사록(近思錄)』, 『주자어류(朱子語類)』에는 별반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주자 이전 시대의 원 유학(原儒學), 즉 선진(先秦)과 진(秦)·한(漢)·당(唐) 시대의 경서와 주석을 널리 읽고 참고해 주자의 학문 및 사상적 권위를 스스로 넘어섰다.

공주 유천에서 머물 때 역시 『논어』에서부터 『춘추』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경전들을 반복하고 송독해 심신에 체험하면서 “앞선 유학자들이 밝혀 드러낸 것을 참고하고 고금(古今)의 다스림과 어지러움을 고증했는데 밤낮으로 생각하고 탐구하느라 먹고 자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

특히 윤휴는 특별히 스승을 따로 모시지 않고 오로지 자득(自得)과 체득(體得)의 방법으로 높은 학문적 경지에 올랐다. 그가 주자의 권위를 넘어서 독자적인 경전 해석과 저술을 내놓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스스로 탐구하고 사색하면서 얻은 결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주 유천에 머문 6년여 동안 윤휴의 학덕(學德)이 외부에 크게 드러났고 명성이 자자해지자 수많은 유현(儒賢)들이 직접 찾아와 교유하기를 청하였다. 이들 가운데 휴재(休齋) 권사성, 석호(石湖) 윤여망, 미촌(美村) 윤길보, 월천(月川) 권수부 등과는 막역(莫逆)의 교유가 되었고 송시열과 송준길 또한 교유한 이들 중에 들어 있었다.

그런데 윤휴는 나이 25세가 되는 1641년 자신의 이름을 고치고 ‘개명설(改名說)’을 지어 그 뜻을 대내에 밝힌 적이 있다.

옛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에 담긴 뜻을 글로 적어놓은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윤휴의 ‘개명설’은 호에 대한 글 못지않게 흥미롭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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