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사회 대신 불평등사회를 선택한 인류”…인간 불평등의 기원과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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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사회 대신 불평등사회를 선택한 인류”…인간 불평등의 기원과 진화
  • 심양우 기자
  • 승인 2015.01.30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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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불평등이다. 1대99로 표현되는 경제적 불평등은 수많은 사회갈등을 초래하며 자본주의의 근간을 위협하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적 차별이 사회 곳곳에 만연함으로써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동등한 인권을 가지며 지위에 차이가 없다는 법 조항은 사실상 사문화됐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경쟁에서 살아남은 개인의 노력에 따른 차별을 용인하며 불평등을 부추긴다. 이는 불평등이 인간 사회에 본래부터 내재하는 현상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불평등의 창조』(미지북스)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과 진화의 역사를 추적한다.

저자들은 불평등이 인간 사회에 내재한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며 농경의 등장 같은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도 아니라는 점을 입증한다.

인류의 초기 조상은 작은 집단을 이루며 살았고 사회적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회 규모가 커짐에 따라 불평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구 성장, 잉여 식량, 귀중품의 축적만으로 불평등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불평등은 모든 인간 집단의 핵심에 있는 고유한 사회 논리를 의도적으로 조작한 결과물이었다.

수렵채집 사회의 일인자는 신, 즉 초자연적인 존재였다. 이인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조상 영혼으로 초자연적 존재의 지시를 수행하면서 살아 있는 인간 후손을 보호했다. 살아 있는 인간 중 어느 누구도 일인자나 이인자가 될 수 없었다.

불평등은 바로 이 서열 순위를 조작해야만, 그리고 새롭게 바뀐 서열 순위를 다른 성원들이 납득해야만 탄생할 수 있었다.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지위를 후손에게 세습하려고 했던 지도자들은 자기네 가계와 조상 영혼, 심지어 신 사이에 연관 관계가 있음을 다른 구성원들에게 납득시키려고 했다. 만약 신, 조상 영혼, 인간으로 이어지는 서열 순위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런 전략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때 신성한 존재들이 사회의 일인자와 이인자라는 개념이 이타심을 북돋우고 살아 있는 인간 사이의 대결을 완화함으로써 사회의 평등을 강화했다면 이후에는 세습 상류층을 창출하는 데 활용되었다.

멕시코, 페루, 서아시아의 선사 시대 사회는 농경이 도입되고 촌락 사회가 정착된 이후 세습 신분 사회로 나아갔고 다시는 이전의 평등 사회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불평등으로 나아가려는 시도에 맞서 평등을 유지한 농경 사회도 많았다. 이 사회들은 개인이 명망이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도 세습 상류층이 되지 못하도록 막았다.

예를 들어 미국 남서 지역의 푸에블로 인디언 사회는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 평등하게 시작한다는 점에서 평등 사회이면서 통과의례를 거친 사람 중 점점 더 소수의 사람들만 배타적인 의식 모임에 입회하고 이를 통해 명망이 높은 지위에 오른다는 점에서 성과에 기반한 불평등의 요소가 있는 사회였다.

버마 고지대의 카친족 사회는 세습적 불평등이 등장했음에도 주기적으로 불평등을 없애고 세습 지위가 없는 평등 사회로 회귀했다. 고고학에서는 이런 변화를 순환적 변동이라고 하는데 카친족의 사례는 평등한 대우를 원하는 지속적인 욕구가 존재하고 이 욕구가 세습적인 특권을 주기적으로 무력화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고고학자들은 고대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아주 오랜 시기 동안 안정을 누렸던 사회들을 여럿 발견했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장기간의 사회적 안정은 정치적 자치권을 지닌 성과 기반 촌락 사회의 결과물이었다.

반면 세습 상류층을 형성하려는 최초의 시도가 사회에 심한 불안정을 초래하기도 했다. 특권과 평등 사이에 일어나는 사회 논리의 모순 때문에 사회가 동요하고 폭력 사태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대부분의 불평등 사회는 족장 가계를 두었지만 독특하게도 소수의 귀족층이 사회를 지배한 곳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곳은 인도 동쪽 끝의 아삼 지역에 위치한 아파타니족이다.

1960년대 인류학자 크리스토프 폰 퓌러 하이멘도르프는 아파타니족을 여러 차례 방문해 관찰했다. 아파타니족은 미테(mite)와 무라(mura)의 두 개 씨족으로 나뉜 불평등 사회였다. 미테는 세습 귀족이고 무라는 노예이거나 노예 출신 평민이 모인 집단이었다.

그런데 두 씨족의 관계는 놀라울 정도로 협조적이었다. 많은 무라 씨족이 미테 씨족과 의식용 건물을 함께 사용했다. 미테 씨족과 부유한 가족 출신의 남자들이 속한 평의회가 촌락을 이끌었다.

세습 지위 사회에 불과했던 불평등 사회는 계층 사회로 나아가면서 왕국을 탄생시켰다.

세계 각지에서 건설된 최초의 왕국은 족장 가계 간의 치열한 권력 찬탈의 결과물이었다. 어느 지역도 단순히 지위 사회의 규모가 커져서 왕국으로 변화한 곳은 없었다.

한 집단이 경쟁 관계에 있는 지위 사회를 무력으로 통일함으로써 왕국이 탄생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공격적인 한 가계가 다른 경쟁 가계를 압도하는 우위를 확보해야 했다.

 

하와이에서는 서구인들이 가져온 무기가, 줄루족 사회에서는 관습을 무시한 새로운 전투 방식이, 훈자 지구에서는 새로 도입된 관개 체계가 그런 역할을 했다.

인류학자 로버트 카네이로는 사회가 자발적으로 자치권을 넘겨주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또한 고고학자 찰스 스펜서는 최초의 국가가 탄생하는 데 반드시 영토 확장이 필요하다는 점을 수학적인 방식으로 뒷받침했다.

스펜서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에 관한 동물학 연구에서 등식을 빌려 족장이 자신의 추종 세력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자원이 한계에 달하고 사회의 성장 곡선이 가파른 상승선에서 평평한 수평선으로 바뀔 때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먼저 백성에게 더 많은 자원을 요구하며 이는 반란을 부르기도 한다. 둘째, 기술 향상을 통해 생산을 증대한다. 셋째, 자원을 얻을 수 있는 영토를 확장한다.

어떤 이유로든 세 번째 방식이 채택되고 그 결과 늘어난 영토가 한계를 넘어서 이전의 족장 사회와 같은 방식으로 관리할 수 없는 수준이 되면 족장이 관리 방식과 사회 논리에 변화를 꾀하면서 국가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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