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절망=아Q의 절망=乙들의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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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절망=아Q의 절망=乙들의 절망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2.08.16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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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⑥ 루쉰 『아Q정전』…모든 乙들의 절망 ‘정신승리’Ⅲ

[한정주=고전연구가] 희망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혹은 “어떤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혹은 “앞으로 잘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희망의 심리, 이것은 루쉰이 ‘다섯 가지 정신 승리법’에 숨겨놓은 아Q의 심리 곧 중국인의 심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루쉰이 볼 때 그것은 ‘암흑과 절망’뿐인 세상에 대한 굴복이자 굴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일찍이 니체는 신이 인간에게 준 최악의 재앙은 ‘희망’이라고 말했다. 희망은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는 재앙 중에서도 최악의 재앙”이기 때문이다.

“희망-판도라는 재앙들로 가득 찬 상자를 가져와서 열었다. 이것은 신들이 인간에게 준 겉으로 보기에 아름답고 매력적인 선물이었고 ‘행복의 상자’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그때 상자에서는 날개를 단 살아 있는 온갖 재앙이 튀어나왔다. : 재앙들은 그때부터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밤낮으로 인간에게 해를 끼쳤다. 그러나 상자에서 단 하나의 재앙이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 그때 판도라는 제우스의 뜻에 따라 뚜껑을 닫았고, 그래서 그 재앙은 상자 속에 남게 되었다. 인간은 영원히 행복의 상자를 집안에 두고 어떤 보물이 그 속에 들었는지 신기해한다. : 인간은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욕심이 날 때면 거기에 손을 뻗쳐보기도 한다. : 인간은 판도라가 가져온 상자가 재앙의 상자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재앙이 행복의 최대 보물인 희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인간이 다른 심한 재앙에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면서 계속 새로운 고통에 잠길 것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에게 희망을 준 것이다. 희망은 실로 재앙 중에서도 최악의 재앙이다. 왜냐하면 희망은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71. 희망’)

간단하게 말해 ‘희망 고문’이라는 얘기이다. 희망이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는 재앙 중에서도 최악의 재앙”이라면 정신 승리의 심리야말로 희망의 또 다른 함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 승리의 함정에 빠져 있는 그 순간 우리는 고통의 현실과 패배의 진실을 외면하거나 망각함으로써 현실과 패배의 고통을 연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Q정전』 속 아Q의 절망, 즉 루쉰이 묘사하는 ‘정신 승리의 조작법’으로 현실의 고통과 패배를 외면하거나 망각하는 아Q의 절망적인 심리 상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절망이기도 하다. 아Q의 절망은 남성 중심사회 앞에서 선 여성의 절망과 다르지 않다. 아Q의 절망은 자본가 앞에 선 노동자의 절망과 다르지 않다. 아Q의 절망은 진학과 취업 앞에 선 학생의 절망과 다르지 않다.

아Q의 절망은 결혼의 문턱 앞에 선 젊은이의 절망과 다르지 않다. 아Q의 절망은 아이의 교육과 진로 문제 앞에 선 부모의 절망과 다르지 않다. 아Q의 절망은 직장 상사의 폭력 앞에 선 회사원의 절망과 다르지 않다. 아Q의 절망은 선배의 폭력 앞에 선 후배의 절망과 다르지 않다. 아Q의 절망은 힘이 강한 자 앞에 선 힘이 약한 자의 절망과 다르지 않다.

아Q의 절망은 -거대 권력이든 미시 권력이든- 권력의 폭력 앞에 선 소시민의 절망과 다르지 않다. 아Q의 절망은 혐오와 배척 앞에 선 사회적 소수자의 절망과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아Q의 절망은 우리 사회 모든 을들의 절망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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