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磻溪) 유형원① 혁명과 개혁의 땅 ‘우반동’의 두 번째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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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磻溪) 유형원① 혁명과 개혁의 땅 ‘우반동’의 두 번째 주인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2.05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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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㉖
▲ 허균과 유형원이 거처로 삼으면서 ‘혁명과 개혁의 땅’의 역사에 기록된 전북 부안군 변산 남쪽의 우반동.

[한정주=역사평론가] 전북 부안 변산(邊山)에 위치한 우반동(愚磻洞)은 신분 차별이 사라진 새 세상을 꿈꾸다 죽임을 당한 풍운아 허균이 일찍이 마음을 빼앗겨 정착하려고 했을 만큼 아름다운 산수와 풍요로운 물산을 자랑하는 곳이다.

허균은 큰형 허성에게 보낸 글에서 “변산의 남쪽 기슭에는 우반곡(愚磻谷)이 있습니다. 그곳은 땅이 기름지고 평탄하며 수석(水石)이 아름다워 경치가 빼어납니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하고 개울과 골짜기가 고요하고 아늑하여 참으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입니다. 또한 바닷가여서 물고기와 조개의 생산이 풍부합니다. 소금을 굽고 곡식을 심으면 아무리 흉년이 든다고 해도 사람이 죽을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허균이 부안을 처음 찾은 때는 1601년으로 그의 나이 33세 즈음 이었다. 그는 훗날 ‘산월헌기(山月軒記)’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젊었을 때 전운판관(轉運判官)의 직무를 맡아 호남에서 조운(漕運)을 감독하여 해상(海上)을 왕래하는 일에 익숙했다. 그때 부안(扶安)의 봉산(蓬山: 변산)을 몹시 좋아하여 그 기슭에 오두막을 짓고 세상을 피해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 가운데 골짜기가 있는데 우반(愚磻)이라고 합니다. 가장 거처할 만한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직접 가서 보지는 못하고 단지 정신(精神)만 그곳을 향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1608년(선조 41년. 나이 40세) 가을 관직에서 해임되자 허균은 가족들을 모두 이끌고 우반동으로 내려가 집을 짓고 평생을 마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정사암(靜思庵)이 있던 곳에 집터를 잡아 중수(重修)하고 생계를 연명할 약간의 전장(田莊)까지 갖추었다.

허균은 이때의 일을 ‘정사암중수기(靜思庵重修記)’라는 글에서 자세히 밝혔는데, 이 글은 우반동의 풍경을 절묘한 필치로 아름답게 묘사한 걸작이다.

“부안현 바닷가에 변산(邊山)이 있다. 변산의 남쪽에 골짜기가 있는데 우반동(愚磻洞)이라고 부른다. 부안현 사람인 부사(府使) 김청(金請)이 그 빼어나게 뛰어난 장소를 선택해서 암자를 짓고 정사암(靜思菴)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늙은 말년에 즐기고 쉴 만한 곳으로 삼았다.

내가 일찍이 나랏일을 맡아 호남을 왕래했는데, 그 빼어난 경치에 대해 귀가 닿도록 들었지만 미처 가서 보지는 못했다. 본래 나는 영예와 이익을 즐거워하지 않아서 항상 후한(後漢) 때의 은자(隱者)인 상자평(尙子平)의 뜻을 가슴에 품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올해 공주부사(公主府使)에서 파직 당하자 남쪽 지방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장차 이른바 우반동이라는 곳에 몸을 의탁해 복거(卜居)하였다. 김공(金公)의 아들인 진사 김등(金登)이 ‘제 선친이 남겨주신 낡은 오두막집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서는 도저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공께서 다시 고쳐서 거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뻤다. 고달부(高達夫)와 두 이씨(李氏)와 더불어 말고삐를 나란히 잡고 그곳에 가서 보았다. 개펄과 나란히 작고 좁은 길이 나 있었다. 구불구불 돌아서 가다가 우반동으로 들어섰다.

우거진 풀숲에서 쏟아져 나오는 졸졸 흐르는 개울 물소리가 마치 옥이 부딪치는 듯한 소리를 냈다. 개울을 따라 몇 리를 가지 않았는데 산이 열리면서 드넓은 땅이 나타났다. 좌우의 높고 험한 봉우리는 마치 봉황새와 난새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날아오르는 듯한 형상을 띠고 있었다. 동쪽의 산기슭에는 소나무와 전나무 만 그루가 하늘을 찌를 듯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나는 세 사람과 더불어 곧바로 내가 살 집터를 향해 나아갔다. 동서(東西)로 언덕이 셋 있었는데 가운데 언덕이 가장 넓고 컸다. 대나무 수백 그루가 울창하게 들어서 파란빛을 싱싱하게 발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가(人家)가 버려진 터라는 것을 오히려 분별할 수 있었다.

남쪽으로는 넓고 깊은 대해(大海)가 바라다보이고, 그 가운데 금수도(金水島)가 자리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무성한 수풀이 울창한데, 그 속에 서림사(西林寺)가 있어서 승려 몇 명이 거처하고 있었다.

걸어서 개울 동쪽을 따라 올라가 옛적 당산나무를 지나치면 이른바 ‘정사암(靜事菴)’에 이르게 된다. 암자는 겨우 네 칸 정도인데 벼랑의 바위 위에 지어놓았다. 앞으로 고개를 숙이면 맑은 못이 내려다보이고 마주 보면 우뚝 솟은 세 개의 봉우리가 서 있었다. 날아오르는 듯한 폭포가 푸른 절벽에서 쏟아져 내리고, 마치 흰 무지개가 개울로 내려와 물을 마시는 듯 그윽했다.

나를 포함해 네 사람은 모두 상투를 풀고 옷을 벗고서 못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가을꽃이 막 피어나고 단풍은 반쯤 물이 들었다. 석양이 아직 산봉우리에 걸려 있어서 하늘의 그림자가 거꾸로 물에 비쳤다. 이곳을 내려다보고 저곳을 올려다보면서 시를 짓다가 읊조리곤 하였다.

훌쩍 세속을 벗어난 풍취(風趣)가 일어나 마치 신선(神仙)인 안기생(安期生), 선문자(羨門子)와 함께 삼도(三島)에서 노닐며 즐기는 것만 같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행하게도 건강할 때 벼슬에서 물러나 산수 간에 머물고 싶었던 오래묵은 빚을 갚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숨어살 곳을 얻어 내 몸을 편안하게 쉴 수 있겠다. 하늘의 나에 대한 보상 역시 풍성하다. 벼슬이 어떤 물건이기에 감히 사람을 조롱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였다.

고을 수령인 심덕현(沈德顯)이 암자가 폐허가 되어 돌보는 사람이 없다고 여겨 승려 세 사람을 모집하여 쌀과 소금 약간씩을 보태주고 나무를 베어 수리하게 하였다. 또한 관청의 부역(賦役)을 면제해주는 대신 이곳에 거처하며 지키도록 책임을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암자가 예전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정사암중수기’

그러나 우반동을 터전 삼아 평생을 마치려고 했던 허균의 뜻은 오래가지 못했다. 허균의 기이하고 파격적인 행동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조정 관료와 사대부들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허균이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도 마땅하지 않지만 태평세상(?)을 만나 도원(桃源: 은둔)의 뜻을 품는 것도 옳지 않다는 여론을 일으켰다. 그리고 1609년 1월 허균을 끝내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해 우반동에서 한양으로 불러 올린 다음 명나라로 보내 버렸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이후 형조참의에 올랐다가 다시 유배형에 처해지고 또 다시 관직에 복직되는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허균은 틈만 나면 우반동을 찾아 심신을 달래고 새 세상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그러다가 1618년 역모를 꾸몄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허균이 역적의 누명을 쓴 채 죽임을 당한 이후 우반동은 그렇게 역사의 시선에서 멀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허균이 세상을 떠난 지 정확하게 35년이 지난 1653년 허균을 능가하고도 남을 또 한 명의 풍운아가 우반동을 거처로 삼으면서, 이곳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혁명과 개혁의 땅’으로 화려하게(?) 재등장한다.

실학의 대부인 성호 이익이 조선이 개국한 이래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시무(時務)를 알았던 사람은 오직 율곡 이이와 이 사람 뿐이라고 했던 인물. 북학파의 비조인 담헌 홍대용이 우리나라 사람이 저술한 책 가운데 경세유용지학(經世有用之學)은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와 이 사람이 지은 서책이 있을 뿐이라고 했던 인물.

그는 조선 최고의 개혁서로 평가받고 있는 『반계수록(磻溪隧錄)』의 저자 유형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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