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磻溪) 유형원② 크게 조선을 개혁할 성군을 기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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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磻溪) 유형원② 크게 조선을 개혁할 성군을 기다리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2.0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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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㉖
▲ 이양원 동덕여대 교수가 그린 반계 유형원의 영정.

[한정주=역사평론가] 유형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1622년(광해군 14년) 한양에서 태어났다. 조선 사회를 뿌리 채 뒤흔든 양대 전란의 한복판에서 출생한 그에게는 이미 파란만장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형원이 태어난 지 불과 1년 만에 그의 아버지 유흠(柳歆)은 이른바 ‘유몽인의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서 자결하고 만다. 그 후 유형원은 외숙부 이원진과 고모부 김세렴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우고 익혔다.

이원진은 훗날 유형원의 학풍을 이어 남인 실학파의 산실 역할을 한 이익의 당숙이었다. 또한 김세렴은 중국 사정에 밝고 사신으로 일본에도 내왕한 적이 있는 박학다식한 인물이었다.

유형원은 이 두 사람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유학의 경전과 제자백가서는 물론 역사·지리·병법·법률 등 다방면에 걸쳐 학문을 배우고 익히면서 높은 안목과 깊은 식견을 쌓을 수 있었다. 정치·경제·교육·국방·행정 등 모든 방면에서 조선의 현실을 분석하고 개혁 대책을 담은 방대한 규모의 『반계수록』을 저술할 수 있었던 학문적 기틀은 이때 이미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형원은 과거급제를 통한 입신양명에 크게 뜻을 두지 않았다. 14세 때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원주→양평→여주 등지로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오로지 학문 연구와 양대 전란 이후에 불어 닥친 사회 변화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았다.

유형원은 평생 진사(進士) 이상의 지위를 누리지 않았다. 진사라는 타이틀조차도 자신의 입신양명을 간절히 바라는 할아버지의 유명(遺命)을 저버리지 못해 과거에 마지못해 응시해 얻었을 뿐이다. 이 때문인지 33세나 되는 늦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를 치렀고 이후 다시는 과거시험장에 발걸음도 들여놓지 않았다.

그런데 이보다 1년 전인 1653년(효종 4년) 나이 32세 겨울 유형원은 “고요하게 거처한 이후에야 안정을 찾을 수 있고 안정이 되어야 깊이 생각할 수도 있다”는 옛사람의 말대로 살 뜻을 세우고 마침내 선조(先祖)의 오래 된 터전과 할아버지 유성민의 전장(田莊)이 있던 전북 부안현 변산의 우반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경기 과천에 살던 유형원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화답하는 글 한 편을 짓고 우반동으로 들어가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

“돌아가자! 한 해도 저물어 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진실로 스스로 터득하여 정성스럽게 살아간다면 어찌 바깥의 사물이 내게 슬픔이 될 수 있겠나? 예전에 내가 처음 학문을 시작할 때 오로지 성인(聖人)이 되기를 기약하였다. 강물의 맑음과 탁함을 살피며 털끝만큼이라도 잘못이 있을까 근심하였다. 항상 꿈쩍도 하지 않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똑바로 앉아 한 해를 마치느라 아침에 밥 먹고 겨울에 옷 입는 것조차 잊었다. 번잡하게 사물은 아주 많지만 이치란 예외 없이 조그마한 사물까지 드러내어 밝힌다. 분명함과 드러남 사이에서 날아오르기도 하고 내달리기도 한다. 공경(恭敬)과 의리(義理) 둘 다 지키는 것이 덕(德)에 들어가는 문이니 물러나 고요한 곳에 숨어도 나는 어두워지지 않을 것이다. 너의 본성을 잃지 말고, 저 허상을 경계하고, 이치의 혼란을 다스린다. 고금(古今)의 역사를 바르게 증험(證驗)하고 맹자의 글과 안자(顔子 : 안회)의 행동에서 진리를 찾아낸다. 『반계잡고(磻溪雜稿)』,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화답하는 글(和陶靖節歸去來辭)’

여기에는 비록 고요하고 궁벽한 곳에 몸을 숨기고 살아도 자신의 뜻만은 어두워지거나 가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드높은 기상과 함께 고금의 역사를 연구하고 옛사람이 남긴 경전 속 말과 행동에서 진리를 찾아내 장차 세상에 크게 쓸 대책을 만들겠다는 당당한 포부가 담겨 있다.

그리고 부안에 도착하자마자 지은 ‘부안에 도착하여(到扶安)’라는 한 편의 시를 통해서는 백성과 더불어 사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겠다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의지를 피력하기도 했다.

“세상을 피해 남쪽 지방으로 내려와서 / 바닷가 옆에서 직접 농사지으려 하네 / 창문을 열면 어부들 노랫소리 울려오고 / 베개에 기대면 노 젓는 소리 들려오네 / 포구를 나서면 모두 바다와 통하고 / 멀리 있는 산은 구름에 반쯤 가렸네 / 모래 위 갈매기 놀라 날아오르지 않고 / 장차 그대들과 어울려 함께 살아야지.”

우반동에 몸을 맡긴 이후 유형원은 자신의 호를 ‘반계(磻溪)’로 삼았다. 반계라는 호를 풀이하자면 ‘우반동의 개울’이라는 뜻이다.

실제 우반동의 중앙으로 흐르는 개울의 이름이 반계이다. 그러나 반계는 단순하게 지명(地名)을 취해 호를 삼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여기에는 숨은 뜻이 있었다는 얘기다.

‘강태공(姜太公)’이라는 별호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여상(呂尙)이라는 인물은 중국의 고대 왕조인 은(殷)나라 말기 폭군인 주왕(紂王)이 다스리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피해 ‘미끼도 없이 세월을 낚는 일’을 벗 삼아 지냈다.

주(周)나라의 국조(國祖)인 문왕(文王)이 책사를 얻기 위해 그를 찾아갔을 때에도 여상은 여전히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태공이 낚시를 한 그곳의 이름이 다름 아닌 ‘반계(磻溪)’다.

반계에서 여상은 낚시를 하며 마냥 세월을 보냈던 것이 아니라 성군(聖君)이 자신을 찾아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문왕을 따라 출사(出仕)한 여상은 이후 주나라 개국의 기반을 만들었고, 또한 문왕이 죽고 난 후에는 무왕(武王)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우는데 일등 공신의 역할을 했다. 이 공로로 여상은 중국 대륙의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제(齊)나라를 분봉 받아, 제나라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여상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피해 몸을 숨긴 채 성군이 나타나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유형원은 우반동에서 조선을 크게 개혁할 성군이 나오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자신의 경세지학(經世之學)을 크게 펼쳐볼 수 있을 것이라는 포부와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우반동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 과천에서 지은 글에서도 유형원은 분명하게 “비록 세상에서 물러나 조용하고 궁벽한 곳에 몸을 숨기고 살아도 나의 뜻만은 어두워지거나 가려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자신의 의지를 밝힌 적이 있다.

유형원이 호로 삼은 ‘반계’에는 이렇듯 혼란스러운 세상을 피해 몸은 숨겼지만 자신의 뜻을 펼칠 때가 오면 세상에 나아가 ‘나라와 백성을 구제할 대책’을 실천하겠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실제 유형원은 우반동에 거처한 첫 해부터 49세가 되는 1670년까지 무려 18년에 걸쳐 나라와 백성을 구제할 체제 개혁 대책을 연구했고 그 성과를 집대성한 『반계수록』을 저술했다.

이러한 유형원의 우반동 생활에 대해서는 이익이 지은 ‘반계유선생전(磻溪柳先生傳)’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마침내 남쪽 지방으로 돌아가 부안(扶安)의 변산(邊山) 아래에 거처하였다. 몇 칸 안 되는 작은 오두막집에 서적 만 권을 간직한 채 마음을 다해 깊이 생각하느라 먹고 자는 것조차 잊기에 이르렀다. 항상 고인(古人)에게 한 걸음 미치지 못한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일찍이 한가롭게 지낼 때 깊게 생각하여 천하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소임(所任)으로 삼았다. 또한 세상의 학자들이 시무(時務)에는 통달하지 못한 채 한갓 경전이나 입으로 외우고 눈으로 읽는 것만을 숭상하여 그 말하는 것이 모두 구차할 뿐임을 병통(病通)으로 여겼다. 그 까닭에 집안이나 나라에서 일을 당하게 되면 그릇되고 어긋나서 결국 큰 소리만 칠 뿐 실질(實質)은 없는데, 그로 인한 재앙은 백성들이 받는 것을 가슴 아파 했다. 이에 선왕(先王)의 법을 가져다가 그 시작과 변천의 내력과 역사를 상세하게 고찰하고 국가의 전적(典籍)을 참고하여 하나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 규모가 광대하고 절목(節目)은 상세하며, 인정(人情)에 증험하고 천리(天理)를 헤아려서 근육과 맥박이 서로 잇대어져 있고 기혈(氣血)이 두루 통하였다. 여기에『반계수록(磻溪隧錄)』이라고 제목을 붙였으니, 요컨대 오늘날 시행할 만한 것들이다.” 『성호전집(星湖全集)』, ‘반계유선생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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