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사…식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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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식인의 역사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2.11.14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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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⑨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탐욕과 광기와 식인의 역사Ⅰ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중에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중에서

[한정주=고전연구가] 역사에는 몇 가지 신화가 있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서사와 ‘정의가 승리한다’는 서사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특히 ‘진보’와 ‘정의’는 국가와 권력의 역사 서사라고 할 수 있는 정사(正史)나 국사(國史)의 이데올로기를 지배하고 있는 신화이다. 진보와 정의의 신화야말로 역사의 승자라고 할 수 있는 국가와 권력의 역사적 정당성과 정통성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서사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역사는 정의로울까. 정의롭기보다는 오히려 더럽고 추악한 게 인간의 역사는 아닐까. 루쉰의 『광인 일기』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역사가 감추고 있는 민낯을 날카롭게 해부하고 통렬하게 풍자하면서 ‘정의’라는 역사의 신화를 근본에서부터 전복하고 해체한다. 그들의 눈에 비친 인간의 역사는 정의롭기보다는 더럽고 추악하며 심지어 끔찍하고 잔혹하기까지 하다.

『광인일기』의 화자인 ‘나’ 광인(狂人)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한다는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혀 있다. 광인은 왜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는지 그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 역사책을 펴서 조사와 연구를 시작한다.

그런데 역사책에는 “연대는 없고 모든 책장마다 ‘인의도덕(仁義道德)’이라는 글자들만” 비뚤비뚤 씌어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한밤중까지 자세히 역사책을 살펴보던 광인은 어느 순간 글자들 틈새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글자를 발견한다. 그것은 온 책 가득 씌어있는 ‘식인(食人)’이라는 두 글자였다. 그제서야 광인은 왜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는지 깨닫게 된다.

『광인일기』를 읽은 독자들은 전반부에서부터 도대체 이 황당하기도 하고 기묘하기도 한 광인의 미친 넋두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다.

도대체 루쉰은 광인의 이 황당하고도 기묘한 발견, 즉 역사책을 온통 도배하고 있는 ‘인의도덕’의 틈새에 숨겨져 있는 ‘식인’이라는 두 글자의 발견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역사는 ‘인의도덕의 역사’가 아니라 ‘식인의 역사’라는 사실이다. 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인의도덕=식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루쉰은 ‘인의도덕’이 ‘식인’이라고 말한 것일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식도 남기지 않고 남편이 갑작스럽게 죽은 조선시대 양반 가문의 젊은 여성에게 닥친 운명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이 여성의 시가(媤家)인 양반 가문이 그녀에게 원하는 가장 도덕적인 선택은 무엇일까. 늙어 죽을 때까지 죽은 남편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수절(守節)하는 것일까. 아니다. 죽은 남편을 따라 자결하는 것이다. 자결은 그 시대가 젊은 여성에게 선택을 강요한 최상의 도덕적 가치이자 윤리적 죽음이다.

또한 수절하면 양반 가문에 아무런 혜택이 없지만 만약 이 여성이 자결이라도 해주면 어마어마한 혜택을 누리게 된다. 먼저 죽은 여성은 열녀로 추앙돼 나라에서 양반 가문에 홍살문을 내릴 것이다. 유학의 도덕윤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 양반 가문에게 이보다 더한 명예와 영광이 있겠는가.

도덕적인 명예와 영광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혜택도 있다. 양반 가문은 나라에서 내리는 토지 혹은 재물에다가 각종의 세금 혜택은 물론이고 과거에 급제해야 누릴 수 있는 벼슬자리까지 얻을 수 있었다. 이 젊은 여성이 결국 자결을 선택한다면 그녀를 죽인 것은 무엇일까. 자신인가, 아니면 시가인 양반 가문의 사람들인가. 아니면 인의도덕인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든 혹은 양반 가문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죽음이든 상관없이 결국 그 시대를 지배한 인의도덕이 그녀를 죽인 셈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면 인의도덕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고 양반 가문 사람들이 그녀에게 죽음을 강요했다면 그 역시 인의도덕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양반가 여성의 죽음이야말로 ‘인의도덕=식인’이 아니고 무엇인가.

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일상적으로 배우고 익히고 가르친 도덕적 삶과 윤리적 가치를 담고 있는 『소학(小學)』이니 『명심보감(明心寶鑑)』이니 『열녀전(列女傳)』이니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니 하는 책들을 펼쳐보라. 이와 유사한 사례의 이야기들이 가득차고도 넘친다.

그곳에는 애국, 충절, 효행, 정절, 우애, 선행, 의리, 인륜, 예의, 예절 등 온통 ‘인의도덕에 관한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 이야기의 감추어진 실체를 들여다보면 루쉰의 말대로 결국 인의도덕이 죽인 사람들의 이야기 다시 말해 ‘식인에 관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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