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한당(所閑堂) 권람…“글이나 읽으면서 한가롭게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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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당(所閑堂) 권람…“글이나 읽으면서 한가롭게 지낸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2.15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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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의 자호(字號) 소사전⑮
▲ 소한당 권람의 영정.

[한정주=역사평론가] 자(字)는 정경(正卿). 양촌 권근의 손자로 한명회와 함께 수양대군을 도와 왕좌에 올린 일등공신이다.

나이 35세(1450년)가 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다행히 문종 즉위년인 그해 향시(鄕試)와 회시(會試)에서 장원급제하고 비록 전시(殿試)에서는 4등을 했지만 장원을 한 사람의 출신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운 좋게 장원을 차지하였다.

다음해 집현전 교리가 되었을 때 『역대병요(歷代兵要)』의 편찬 작업에 참여하면서 수양대군과 가까워졌다. 그 후 수양대군과 한명회를 이어주는 가교(架橋)가 되어 계유정난과 단종폐위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세조 즉위 이후 출세가도를 달려 좌의정에 오르고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기까지 했다. 만년에는 부귀영화가 극도에 이르러 남산 아래에 호화 저택을 짓고 막대한 재부(財富)를 축적했다고 한다.

그의 호 ‘소한당(所閑堂)’은 벼슬길에 나서기 전에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권람은 남산 아래 할아버지 권근의 옛집인 후조당(後凋堂) 벼랑 위에 조그마한 초당 한 채를 짓고 ‘소한당(所閑堂)’이라고 이름 붙이고 책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목은 이색의 제자였던 권람의 할아버지 권근은 조선에서 벼슬하는 것을 부끄러워했고 권근의 아버지였던 권제 역시 대제학에 오를 만큼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지만 조정에 있을 때나 집에 있을 때나 사람들과 거의 교유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남산 아래 집은 거의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흉가나 다름없었는데 권람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상황이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권람은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찾아갈 곳도 없는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 ‘글이나 읽으면서 한가롭게 지낸다’는 뜻을 담아 ‘소한당(所閑堂)’이라고 자호(自號)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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