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곡(潛谷) 김육① 잠곡에서 구상한 조선 최고의 개혁 정책 ‘대동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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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곡(潛谷) 김육① 잠곡에서 구상한 조선 최고의 개혁 정책 ‘대동법’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2.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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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㉗
▲ 잠곡 김육의 영정.

[한정주=역사평론가] 조선의 16세기가 ‘사림의 시대’였다면 17세기는 ‘보수의 시대’였다. 사계 김장생→신독재 김집→우암 송시열로 계보를 잇는 보수적 성리학자들이 정치와 경제 권력을 독점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상과 지식 권력까지 장악한 채 자신들에게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핍박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양대 전란으로 인한 혼란까지 겹쳐 이 세기에는 정치적 위기와 사회경제적 모순이 그 어떤 시대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병자호란의 후유증으로 농촌 경제가 피폐해지고 민생이 파탄나면서 가혹한 공역(公役)과 조세에 대한 부담 탓에 전국 각지에서 백성들이 자신의 터전을 떠나 유랑하거나 심하게는 도적으로 변해 살아가는 현상이 크게 번져 사회 문제가 되었다.

결국 이 문제는 조정 내에서 공론화되었고 ‘보수파’와 ‘개혁파’ 관료 사이에 대논쟁을 촉발하게 되었다.

비록 서인(西人)으로 대표되는 보수 세력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에 이롭다’는 안민익국론(安民益國論)을 주장하면서 민생을 모든 정책의 최우선에 둔 개혁적인 관료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개혁파 관료들을 대표했던 사람이 김육이었다. 김육은 신분질서와 사회통제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호패법(號牌法)’을 통해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보수파 관료들에 맞서 과중한 공물(貢物)에 따른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획기적으로 덜어주어 민생을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을 들고 나섰다.

호패법과 대동법을 둘러싼 보수파와 개혁파 간의 최초 논쟁은 김육이 경기도 가평 잠곡(潛谷)에서 다시 중앙 정계로 돌아온 직후인 1623년(인조 원년)에 일어났다.

당시 최명길, 유공량 등 보수파 관료들은 백성의 유랑민화나 도적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호패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육, 조익과 같은 개혁파 관료들은 호패법은 사회 정치적 불안과 위기감을 한층 더 고조시킬 뿐이고 먼저 민생을 안정시켜야 한다면서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했다.

특히 김육은 호패법을 철폐하자는 주장에 그치지 않고 호패를 지니고 다니는 자에게 죄를 주자는 급진적인 주장까지 내세웠다. 백성을 감시하고 사회를 통제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민생 안정과 나라 재정을 복원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김육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이 논쟁은 김육이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대동법의 시행을 다시 건의한 1638년으로 연기되고 만다.

대동법은 사회를 통제하고 감시하며 과중한 공역과 세금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데 혈안이 되었던 관리들이 판을 치는 암흑의 시대에 백성들에게는 한줄기 빛과 같은 역할을 한 개혁 정책이었다.

그렇다면 김육은 어떻게 해서 ‘대동법’과 같이 민생을 최우선에 두는 정책을 입안하고 시종일관 그 시행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답은 김육이 34세 때 벼슬에 대한 뜻을 접고 한양을 떠난 후 10여 년 동안 몸소 농민들과 더불어 농사짓고 살았던 경기도 가평 잠곡(潛谷) 시절에서 찾을 수 있다.

선조 13년인 1580년 한양의 서부 마포리에서 태어난 김육은 퇴계 이황의 제자였던 지산(芝山) 조호익에게 처음 가르침을 받다가 15세 때 해주에 가서 율곡 사후 서인(西人)의 큰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던 우계 성혼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로 인해 김육은 당색(黨色)으로 보면 서인의 정통에 속했다.

김육을 가르친 성혼은 그의 남다른 자질을 눈여겨보고 “이 아이는 반드시 크게 될 재목이니 가르칠 만하구나”라고 칭찬했는가 하면, 그 일기(日記)에서는 “학문의 이치를 크게 통달하였다. 시와 문장이 모두 맑고 원만하며 기묘하고 흥취가 있다. 지혜와 재주가 뛰어난 기동(奇童)이라고 할 만하다”고 썼다.

대학자 성혼의 예견대로 김육은 26세(1605년. 선조 38년)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연이어 성균관시(成均館試)에서 장원을 차지하며 문명(文名)을 떨쳤다.

그러나 승승장구할 것 같던 김육의 인생은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큰 격랑을 만나게 된다.

광해군이 즉위한 지 2년째 되는 해(1610년) 김육은 태학생(太學生)의 신분으로 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 등 이른바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종사해 달라’는 상소문을 올려 이를 성사시켰다.

그런데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북파(大北派)의 영수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온당치 않는 일이라는 상소문을 올려 반대하고 나섰다. 조식의 직전 제자였던 정인홍은 자신의 스승은 제외시키고 이황만 문묘에 종사하는 것을 용납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당시 김육은 성균관의 학생회장 격인 재임(齋任)이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몹시 분노하여 성균관 유생들과 상의한 끝에 유학자의 명부인 청금록(靑襟錄)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해버렸다.

그러나 이 일로 말미암아 김육은 정치 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대북파의 힘에 의지해 권력을 유지하던 광해군은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지워버린 김육을 엄하게 처벌하려고 했다.

그나마 다행하게도 이항복과 이덕형의 간청으로 사건이 무마되면서 김육은 간신히 처벌만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육은 이미 벼슬에 나가 보았자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찍이 전란(임진왜란) 중이던 17세 때 고모부를 따라 가본 적이 있는 경기도 가평 잠곡의 청덕동(淸德洞)에 홀로 들어가 우거할 결심을 한다. 이때가 광해군 5년(1613년)으로 김육의 나이 34세였다.

그리고 김육은 잠곡의 지명을 취해 자신의 호로 삼으면서 오직 은둔에 뜻이 있을 뿐임을 내외에 밝혔다.

그의 문집인 『잠곡유고(潛谷遺稿)』에 남아 전해오는 ‘역사서를 보고 느낌이 있어서(觀史有感)’이라는 시를 읽어보면 한양 도성을 떠나 궁벽한 시골인 잠곡에 은둔할 결심을 했던 당시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옛 역사서 보고 싶지 않으니 / 읽다 보면 매양 눈물이 나기 때문이네 / 군자는 반드시 곤란을 겪고 재앙을 당하나 / 소인배는 자신의 뜻 많이 얻었네 / 일이 성공할 만하면 문득 패망이 싹트고 / 안정을 이루고자 하면 이미 위험에 이르렀네 / 하(夏)·은(殷)·주(周)의 삼대(三代) 아래로는 / 하루라도 다스려진 것 보지 못했네 / 백성은 또한 무슨 죄인가 / 저 푸른 하늘의 뜻 까마득해 알 길 없네 / 이미 지난 일이 오히려 이와 같은데 / 하물며 오늘날의 일이야 어떠하게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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