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간의 한 가지 유희…‘해야만 하는 사람’ vs ‘하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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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간의 한 가지 유희…‘해야만 하는 사람’ vs ‘하고 싶은 사람’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2.16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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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⑧
▲ 『지봉유설』(위쪽)과 『성호사설』.

[한정주=역사평론가] 눈 속 고각(高閣)은 단청이 더욱 밝다. 강 가운데 가냘픈 피리 소리의 곡조가 갑자기 높아진다. 마땅히 밝은 색깔과 높은 소리에 구애받지 말고 먼저 흰 눈과 맑은 강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몸소 풀무질하던 혜강(嵇康)과 나막신을 좋아했던 완부(阮孚)에게 한번 눈길을 돌려서 이들 호걸(豪傑)이 마음 붙였던 것을 기롱하거나 책망한다면, 그 사람은 조금도 세상사에 밝지 못한 자이다. 이러한 사람의 가슴속에 과연 혜강의 풀무질과 완부의 나막신에 담긴 뜻이 있겠는가?

내가 평생 동안의 일을 돌이켜보니, 다른 사람의 뜻을 얻은 문장을 읽게 되면 미친 듯 절규하고 크게 손뼉을 치며 마음이 가는 대로 붓을 움직여 품평하였다. 이 역시 우주 간의 한 가지 유희(遊戱)라고 하겠다. (재번역)

雪裡古閣 丹靑倍明 江中纖笛 腔調頓高 不當泥於色何明聲何高 當先於雪之白也 江之空也 一轉眼嵇鍛阮屐 豪傑之寓心 譏之責之則不曉半箇事人 伊人胷中 果有鍛與屐乎哉 照吾平生之服 讀人得意之文 狂叫大拍 評筆掀翻 亦宇宙間一遊戱. 『선귤당농소』

만약 세상 모든 일을 유희(遊戱)처럼 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지극한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놀이를 억지로 애써 하는 사람은 없다. 놀이를 마지못해 하는 사람도 없다. 놀이란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고, 재미있고, 즐겁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이덕무는 서이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들이 하는 짓은 어린아이의 소꿉놀이와 너무도 흡사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극한 즐거움이 있습니다”고 말했다.

이덕무의 말에서 나는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 ‘하고 싶은 것’을 추구했던 18세기 지식인의 새로운 철학을 발견한다. 만약 여기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유희의 철학’이자 ‘놀이의 철학’이다.

이덕무에게 학문과 지식, 독서와 글쓰기는 단지 유희이자 놀이였을 따름이다. 이때 ‘해야만 하는 것’이 유학과 도학(성리학) 혹은 과거시험용 학문과 지식이라면 ‘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학문과 지식 밖의 것, 즉 박물학(博物學)이다.

그래서였을까? 조선 최초의 박물학, 곧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에 대해 김현성은 “공(公: 이수광)의 뜻은 처음부터 저술에 있지 않고 유희(遊戱) 삼아 적어둔 것을 책으로 엮었다”고 했다.

더욱이 또 다른 백과사전인 『성호사설』을 지은 이익은 스스로 “이 저서는 성호옹(星湖翁: 이익)의 희필(戱筆)이다”고 밝혔다.

억지로 힘쓰고 애써 꾸며 저술하지 않고 평생토록 유희 혹은 놀이 삼아 써놓은 글들을 모으고 엮은 서책이 『지봉유설』과 『성호사설』이라는 얘기다.

특별한 목적이나 아무런 뜻 없이 글을 썼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이 두 저서는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어떤 서적보다 특별한 문헌이자 희귀한 기록이 되었다.

‘해야만 하는 것’을 하는 사람과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 중 누가 더 현달(顯達)한 사람인가? 깊게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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