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곡(潛谷) 김육③ 잠곡 10년 생활로 자각·자득한 민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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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곡(潛谷) 김육③ 잠곡 10년 생활로 자각·자득한 민본사상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2.22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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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㉗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의 잠곡서원지.

[한정주=역사평론가] 그렇지만 대문장가 장유는 회정당에 새긴 뜻이 사실 ‘숨어 살면서 고요하게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는 점을 온전히 밝히면서 “숨어사는 것이 막바지에 도달하면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고, 고요하게 거처하는 것이 극치에 이르면 반드시 움직이게 된다. 저 우레와 번개가 잠복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는가”라고 했다.

김육이 비록 지금은 잠곡의 산중에서 조용하게 숨어 지내지만 때가 오면 천둥과 번개처럼 천하를 뒤흔들 것임을 장유는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백후(金伯厚: 김육의 자)가 가평의 화개산(華蓋山) 양지바른 곳에 터를 골라 집을 지은 다음 『황극내편(皇極內篇)』의 ‘범수(範數)’에 의탁하여 점괘를 보았다. 이에 일지삼(一之三)의 수(守)를 얻었는데 그 점괘에 ‘군자는 이로써 숨어 살면서 고요하게 기다린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말을 취해 자신이 거처하는 당(堂)에 회정(晦靜)이라고 이름 붙였다.

드러내고 감추고 움직이고 고요하게 머무는 것은 바로 하늘의 도(道)다. 하늘의 도는 밤에 감추었다가 낮에 드러내고, 겨울에 고요하게 머물렀다가 봄에 활발하게 움직인다. 이렇게 보면 고요함은 움직임의 근본이 되고, 감추는 것은 드러내는 것의 기본이 된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몸을 감추고 숨어 사는 것이 진실로 좋다고 하지만 자신을 닦는 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 고요하게 거처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진실로 좋다고 하지만 자신을 기르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닦지 않고 숨어살기만 한다면 어둡고 캄캄해져서 흐리멍덩해질 뿐이고, 자신을 기르는 일 없이 고요하게 거처하기만 한다면 메마르고 적막해져서 몰락할 따름이다.

또한 일찍이 나는 『중용(中庸)』에서 그러한 논설을 얻은 적이 있다. 거기에는 ‘비단옷 위에 오히려 겉옷을 입은 것처럼 도(道)는 은은하게 날로 드러나야 한다. 은미하게 드러나는 것을 안다면 덕(德)에 들어갈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이 말은 숨어 살면서 자신을 닦는 도리다. 또한 거기에는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 경계하고 삼가며 다른 사람이 듣지 않는 곳에서 몹시 두려워한다’고 적혀 있고 ‘움직이지 않아도 공경하고 말을 하지 않아도 믿게 되면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어도 부끄럽지 않다’고 하였다.

이 말은 고요하게 거처하면서 자신을 기르는 도리다. 이렇게 보면 몸을 숨기고 사는 것과 고요하게 거처하며 기다리는 것은 두 가지 도(道)가 아니고, 자신을 닦는 것과 자신을 기르는 일 역시 두 가지 방법이 아니다.

옛날 군자는 편안하게 거처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명(命)을 기다렸을 뿐 그 밖의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서 험악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천하를 경륜(經綸)할 포부와 계획을 축적하면서 소쿠리 밥과 표주박 물도 달게 여기고 고관대작이 누리는 즐거움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시동처럼 가만히 있어도 용의 기상이 드러나고 깊은 못처럼 잠잠하지만 우레 소리가 난다. 그윽하고 깊숙한 곳에 거처하며 떠나지 않아도 중화(中和)를 이루어서 천지 만물의 지위를 바르게 하고 융성하게 길러준다.

김백후는 집안에서 시(詩)와 예(禮)를 전수받아 학문이 이루어지고 행동이 갖추어졌다. 태학(太學: 성균관)에서 노닐 때는 우뚝하게 높은 인품으로 명망을 쌓았다. 그러나 영예를 좇아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어서 과장(科場)을 피한 채 먼 곳에 가서 살고자 했다. 스스로 궁벽하고 적막한 산골짜기 속으로 들어가 바위굴에 거처하며 개울물을 마셨다. 마치 장차 이러한 생활로 세상을 끝마치려는 듯 했다.

그러나 또한 회정(晦靜)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두고 잊지 않아서 문 위에 걸어두고 좌우명으로 삼아 아침저녁으로 바라보고 살폈다. 이와 같이 그의 뜻은 나날이 높고 밝아져 광대한 경지로 나아가지 않는 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숨어사는 것이 막바지에 도달하면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고, 고요하게 거처하는 것이 극치에 이르면 반드시 움직이게 된다. 저 우레와 번개가 잠복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는가. 소리를 거두고 빛을 갈무리하여 아무런 조짐도 볼 수 없을 때는 그 존재를 알지 못하다가 급기야 기운이 이르고 계기가 드러나 움직이면 순식간에 번쩍이며 빛을 발하고 산악을 울리며 하늘을 환히 밝히는데 어느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이것이 회정(晦靜)의 작용이다. 장차 도(道)가 폐해지게 될지 어떨지는 참으로 감히 알 수가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김백후가 회정(晦靜) 속에서 끝내 자신의 빛을 감추고만 있을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계곡집(谿谷集)』, ‘회정당기(晦靜堂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새로이 인조가 즉위한 직후 중앙 정계에 복귀한 김육이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대동법을 시행하라’고 일갈한 것을 보면 장유의 말이 허장성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육은 1619년(광해군 11년) 나이 40세 때에는 ‘귀신 이강(羸羌)’과 ‘늙은 여우(老狐)’에 빗대어 당시 권력에 눈이 멀어 나라를 망치고 자신의 배를 불리려고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는 권신(權臣)과 간신배들을 풍자하기도 해 자신의 뜻이 단지 산중에 숨어서 조용하게 사는 데만 있지 않음을 온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옥황상제 곁에는 조그마한 귀신이 있는데 / 그 이름을 이강(羸羌)이라고 하네 / 비쩍 말라서 날카롭기가 마치 바늘과 같고 / 형체는 가늘고도 길쭉하네 / 대보름날 밤 컴컴한 어둠을 타고 / 머리를 풀어 헤치고 웃옷과 아랫도리를 걷어 올리고 / 하늘에서 스스로 사뿐히 내려오네 / 뜻과 기운 어찌 그리 양양(揚揚)한 지 / 바람과 구름을 말과 수레 삼고 / 해와 달 빛이 나지 않아 좋아하네 / 인간 세상 두루 주행(周行)하며 / 이 나라 저 바다 아무 곳이나 마구 가네 / 구중(九重)으로 둘러친 궁궐 대문도 오히려 밀어젖히는데 / 어찌 몇 길 높이 담장으로 막겠는가 / 부호(富豪)의 집은 건너뛰고 / 가난하고 천한 사람 사는 마을 두루 도네 / 주인이 잠들기를 가만히 엿보다가 / 신발을 훔치고 불행과 재앙을 내리네 / 집집마다 의심하고 두려운 마음에 / 대문 닫아걸고 깊숙이 몸 감추네 / 아이들은 감히 나오지 못하고 / 부녀자들은 서로 놀라고 두려워 허둥대고 / 조화(造化)의 권세 제 맘대로 부리고 / 생(生)과 사(死)의 그물망 잡고 있네 /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 이야기는 / 그 말이 참으로 허황되고 황당하네 / 사람의 삶에는 정해진 분수가 있어서 / 대명(大命)은 높고 푸른 하늘에 걸려 있는데 / 작고 하찮은 한 마리 요사한 귀신이 / 비록 독을 내뿜은들 어찌 상하게 할 수 있겠나 / 하물며 밝은 옥황상제가 / 아래 세상 구석구석 비춰 보시고 / 온갖 신(神)들 자기 자리 지키며 / 성신(星辰)은 밝은 정기 쏘아대니 / 어찌 이런 괴상한 귀신 용납해서 / 망령되게 기세 떨치게 하리 / 다만 생각하건대 천도(天道)는 멀리 있고 / 작은 뜻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워서 / 사악한 것이 참으로 바른 것을 해치고 / 이치가 더러 그 상도(常道)와 어긋나기도 하니 / 까마득히 넓은 하늘 속에서 / 어찌 요사한 기운이 창성함이 없겠는가 / 깊이 생각하건대 온갖 감회 일어나 / 아마도 역시 맹랑하지는 않는데 / 어찌하면 의천검(倚天劍)을 얻어서 / 구름 베고 그 놈 내장 도려낼까.” 『잠곡유고』, ‘이강(羸羌)’

“우리 집의 남쪽 산 북쪽 골짜기에 / 짙게 그늘 드리운 큰 나무 마치 묶어놓은 듯 빽빽하네 / 등나무와 담쟁이덩굴 감기고 엉켜 대낮에도 어두운데 / 그 속에 여우 살아 바위 아래 엎드려 있네 / 옛 노인들 서로 전하기를 자호(紫狐)의 정(精)이 / 능숙하게 모습 변해 사람 속여 홀린다네 / 더러 사람 사는 집을 향해 손에 불을 들고 있는 모습하고 / 더러 북두성에 절을 하고 머리에 해골 이고 있는 모습하고 / 어둠을 틈타 산에서 나와 요사스런 행태 부리며 / 온갖 아양 떨며 춘정(春情)을 일으켜 사람 눈을 현혹하네 / 연지와 분 발라 가볍게 화장하고 진주와 비취로 장식하고 / 환한 눈에 새하얀 이 마치 옥(玉)과 같은 얼굴에 / 생긋 웃어 때때로 보조개를 만들고 / 갑자기 토라져 수심 가득한 듯 미간을 찡그리다가 / 달콤한 말로 다시 속삭이는 것이 마치 피리를 다루듯이 / 미혹되어 어두운데 그 누가 진실과 거짓 환히 밝히겠나 / 예로부터 젊은이들 수도 없이 빠졌으니 / 그 누가 목석(木石) 같은 심장을 가졌겠는가 / 장차 재빠르게 금(金)과 옥(玉)으로 정표를 만들어서 / 밤마다 성 주변을 경쟁하듯 뒤쫓아 가니 / 혼을 잃고 정기는 상해 죽을 조짐 나타나도 / 막적(莫赤)이 치명적인 짐독(鴆毒)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네 / 여우가 아양 떨며 사람을 홀린다는 이야기는 옛 역사에도 실려 있어 / 괴이한 사건 예전부터 더러 있었지 / 내가 듣건대 천년을 산 여우가 음부(淫婦)로 변화한다는데 / 이런 요물을 어찌하여 재빨리 죽이지 않는가 / 또한 듣건대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우리나라에 있다는데 / 이런 요물이 어찌하여 내 집 가까이에 있는가 / 원하건대 굳세고 강한 활에 백 개의 금 화살을 구해 / 여우 무리 전부 쏘아 일시에 쓸어버리고 싶네.” 『잠곡유고』, ‘늙은 여우(老狐)’

1613년 나이 34세 때 시작된 김육의 잠곡 생활은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난 1623년 나이 44세 때까지 계속되었다. 햇수로 따지면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10년 세월이었다.

그런데 이 10년 동안 백성들과 더불어 살면서 실제 농부의 삶을 살았던 김육은 중앙 정계에 있었으면 도저히 알 수 없었을 ‘민생 현장’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강상윤리(綱常倫理)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격한 신분질서를 강조하며 양반사대부 계층과 자기 당파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 온힘을 쏟았던 서인에 속했으면서도 만약 백성과 나라와 임금과 관리의 이해관계가 달랐을 경우 먼저 ‘백성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김육의 민본 사상과 개혁 성향은 다름 아닌 잠곡의 10년 생활을 통해 자각(自覺)하고 자득(自得)한 것이었다.

앞서 여러 사례에서 보았듯이 한양을 떠나 궁벽한 시골에 우거한 선비들은 많다. 그러나 그들은 한양에 있을 때나 시골에 있을 때나 여전히 백성 위에 군림하던 사대부였다. 그들은 김육처럼 농부로 살지도 않았지만 김육과 같이 민생 현장에 대한 뼈저린 자각도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에 이롭다는 안민익국의 자득도 구하지 않았다.

아마도 잠곡에서 농부로 살면서 김육은 ‘대동법(大同法)’과 관련한 정책 구상을 이미 마무리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10여 년 동안이나 중앙 정계를 떠나 있던 사람이 조정에 나오자마자 곧바로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듯 잠곡과 대동법은 결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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