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삶의 세계…진실 자체보다 ‘믿을만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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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삶의 세계…진실 자체보다 ‘믿을만한 진실’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3.04.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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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⑫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덤불 속』…거짓과 진실 사이Ⅲ
『덤불 속』이 원작인 영화 라쇼몽 스틸컷.
『덤불 속』이 원작인 영화 <라쇼몽> 스틸컷.

[한정주=고전연구가] 그럼 사건의 ‘진실’은 도대체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덤불 속』에는 이 두 개의 ‘진실’ 외에 또 다른 ‘진실’이 등장한다.

사건 현장에는 세 사람만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은 이미 죽었다. 그리고 사건 현장을 목격한 증언자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제3의 ‘진실’이 있을 수 있을까. 제3의 진실은 혼백, 즉 죽은 남자가 무녀(巫女)의 입을 빌려 전하고 있다.

그가 전하는 또 다른 사건의 ‘진실’은 이렇다.

“도둑놈은 아내를 겁탈하고 나서 여러 가지 말로 아내를 달랬다. 삼나무 밑동에 묶인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내가 하는 소리를 믿지 말라, 뭐라고 하든지 거짓인 줄 알아라’는 뜻을 전하려고 몇 번이나 아내에게 눈짓을 했다.

아내는 기운 없이 앉은 채 무릎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도둑놈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여 나는 질투심에 몸부림을 쳤다. 도둑놈은 아내에게 너무나 사랑스러워 엉뚱한 짓을 한 것이라면서 여자가 한번 몸을 더럽히면 남편과는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자신의 아내가 될 생각은 없느냐고 꼬드겼다.

그런데 도둑놈의 말을 듣자 멍하니 고개를 쳐든 아내의 모습은 내가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 순간 아내는 도둑놈에게 분명하게 ‘그럼 어디든지 데리고 가 주세요’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아내는 도둑놈과 손을 맞잡고 덤불 밖으로 나가려다가 묶여 있는 나를 가리키며 ‘저 사람을 죽여주세요. 저는 저 사람이 살아 있으면 당신과 함께 갈 수가 없어요’라고 몇 번이나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나를 죽여 달라는 아내의 말을 듣고 있던 도둑놈은 이렇다 저렇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아내는 도둑놈에게 단 한 방에 걷어차여 쓰러졌다. 도둑놈은 묶여 있는 나를 바라보면서 ‘저 여자를 어떻게 할까? 죽일까 아니면 살려 줄까? 고개만 끄덕이면 돼. 죽일까?’라고 물었다.

내가 잠시 망설이고 있는 동안 아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곧장 덤불 속으로 내달려 도망쳐버렸다. 도둑놈은 뛰어갔지만 아내를 잡지는 못했다. 아내가 도망친 후 도둑놈은 칼과 활을 줍더니 나를 묶고 있는 밧줄을 한군데만 잘라주었다. 그리고 덤불 밖으로 모습을 감췄다.

혼자 남은 나는 아내의 배신에 울부짖었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을 간신히 일으킨 나는 아내가 떨어뜨리고 간 단도를 발견하고 그것을 집어 들어 단숨에 내 가슴에 박아 넣었다. 나는 그대로 거기에 쓰러져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어느새 흐린 어둠이 자욱이 깔려 있어서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내 가슴에 박혀 있는 단도를 뽑았다. 내 입속에서 다시 한 번 피가 넘쳐흘렀고, 나는 죽음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지음, 서은혜 옮김, 『라쇼몬 :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단편선』, 민음사, 2014, p218〜221 참조)

도둑, 여인, 죽은 남자 중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알 수 없다. 도둑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고 여인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고 죽은 남자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다. 아니면 세 사람 모두 ‘진실’이 아닌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진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세 사람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혹은 진실과 거짓이 뒤범벅되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물어보겠다. 만약 도둑, 여인, 죽은 남자의 말 중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누구의 말이 믿을만한지를 두고 진실을 가릴 것이다. 다시 말해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믿을만한 진실’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도둑, 여인, 죽은 남자의 말 중 누구의 말이 믿을만한가. 만약 믿을만한 사람의 말을 선택했다면 우리는 이제 그 사람의 말이 ‘진실’이라고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즉 여인의 말이 믿을 만하다고 선택했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 순간 여인이 ‘진실’을 말한 것이 된다. 죽은 남자의 말이 믿을 만하다고 선택했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 순간 죽은 남자가 ‘진실’을 말한 것이 된다. 심지어 도둑의 말이 믿을 만하다고 선택했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 순간 도둑의 말이 ‘진실’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믿을만한 진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생각이 개입된 진실을 ‘진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 되지 않는가.

우리는 매순간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혼란을 겪는 삶을 살고 있다. 매일 접하는 뉴스만 해도 하나의 사건과 이슈에 대해 신문과 방송마다 말하는 진실이 다르다. A신문에서 ‘진실’인 것이 B신문에서는 ‘거짓’이고 반대로 B신문에서는 거짓인 것이 A신문에서는 진실이다.

심지어 C방송에서는 A신문과 B신문 모두 거짓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사건과 이슈의 팩트(사실관계) 조차 왜곡하거나 조작하는 가짜뉴스까지 보태지면 도대체 무엇이 거짓이고 진실인지 더욱 혼란을 겪게 된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은 팩트조차도 실제로는 각자의 생각이 개입된 팩트 즉 각자가 거짓이거나 혹은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의해 구성되거나 재구성된 팩트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실’의 문제를 다룰 경우 우리는 앞서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에서 다루었던 ‘정의’라는 문제와 비슷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정의’라는 문제를 다룰 때 부딪혔던 애매모호함과 혼란스러움이 ‘진실’의 문제에도 내재되어 있다는 뜻이다.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절대적·보편적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누구나 진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 그 자체’는 애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진실 그 자체’, 즉 개인의 생각이 개입되지 않은 진실이라는 것은-이론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주하는 진실이란 결국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누군가의 생각이 개입되어 있는 진실’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생각이 개입되어 있는 진실이라면 거기에는 진실과 더불어 거짓이 섞여 있을 가능성과 개연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우리의 심리 속에는 자신에게 유리한 경우와 불리한 경우를 따져 진실과 거짓을 뒤섞는 본능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하는 진실을 제대로 직시하기 위해서는 ‘진실 그 자체’, 즉 객관적 진실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주관적 진실 다시 말해 ‘누구의 생각이 어떻게 개입된 진실’인가를 찾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을까. 그렇게 할 때만 진실은 훨씬 더 많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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