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곡(潛谷) 김육④…조선 후기 시장경제의 싹을 틔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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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곡(潛谷) 김육④…조선 후기 시장경제의 싹을 틔우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2.2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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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㉗
▲ 김홍도의 ‘벼타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정주=역사평론가] 그렇다면 대동법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백성의 삶을 안정시킨 조선 최고의 개혁 정책이라고 하는 것인가? 대동법은 기존의 조세 수취 체제에서 두 가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 경제 개혁 정책이었다.

그 하나는 지방 군현의 가구 단위로 부과하던 공물을 토지 소유 면적을 기준으로 부과하도록 바꾼 것이다. 가구 단위로 조세를 부과하는 방식은 토지의 소유 여부 또는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일정하게 공물을 납부하도록 했기 때문에 토지를 많이 소유할수록 이익을 얻는 폐단을 낳았다.

다른 하나는 지방 토산물을 거두어들이는 조세 방식을 일정한 수량의 베나 쌀로 통일해 납부하도록 바꾼 것이다. 이것은 지방 토산물(현물)의 납부에 따른 점퇴와 방납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획기적으로 덜어주었다.

이 같은 이유로 대동법은 토지가 없거나 또는 적은 토지를 소유한 일반 백성의 삶과 생업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반면 그동안 많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공물 납부의 부담을 일반 백성에게 전가시켰던 부호나 지주, 방납 활동으로 막대한 이득을 누렸던 상인, 공물 수납 과정에서 부정한 이득을 취했던 지방 관리들에게는 얻을 것은 하나도 없고 잃을 것밖에 없는 개혁 정책이었다.

특히 지방의 부호나 지주 그리고 관리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한편 자신들이 바로 대토지 소유자였던 중앙의 고위 관료들 역시 대동법이 자신들에게 이로울 것이 전혀 없다고 여겼다.

이들은 거대한 정치 사회 세력을 이루어 김육이 내세운 대동법을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이로 인해 김육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와 이를 반대하는 보수파 간에 대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1623년 첫 번째 논쟁에서 참패한 김육은 충청도관찰사가 된 1638년(인조 16년. 나이 59세)에 다시 대동법 시행을 임금에게 건의하면서 이 논쟁에 재차 불을 지폈다. 그러나 김육의 건의는 지방 토호 세력과 양반 계층 그리고 방납 활동을 하는 상인들과 관리들이 중앙의 보수파 관료들과 결탁해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또다시 좌절되고 만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646년(인조 24년. 나이 67세) 대동법 시행을 둘러싸고 다시 논쟁이 붙었지만 보수파 관료들의 반대와 세수입의 감소를 염려한 인조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대동법은 끝내 시행되지 못했다. 결국 인조 재위 기간 동안 대동법에 관한 논의는 전혀 진전되지 못했다.

그런데 인조가 사망하고 효종이 새로이 즉위하자 김육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관료들은 또다시 삼남(충청도·경상도·전라도)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의견을 올렸다. 조정은 다시 개혁파 대 보수파로 나뉘어 대논쟁을 벌였다. 이때 보수파 관료의 수장은 김집이었다.

조정은 공납제를 개혁해 대동법을 시행하자는 김육의 개혁파(한당)와 대동법을 반대하고 공납제의 일부 개선과 호패법의 실시를 주장하는 김집의 보수파(산당)로 분열되었다.

온 조선을 뒤흔든 대논쟁의 결말은 ‘호서 지역(충청도) 실시, 호남 지역 불가’라는 절충안으로 매듭지어졌다. 그 후 5년이 지난 1657년(효종 8년. 나이 78세) 김육은 다시 효종에게 호남 지역에도 대동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청했고, 다음해 비록 전라도 해안 주변의 마을에서나마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이해 김육은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잠곡에서 다시 세상으로 나온 이후 평생 대동법 시행에 목숨을 걸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김육의 삶이었다.

그런데 김육의 고군분투로 뿌리를 내리게 된 대동법은 단순히 조세 체제의 개혁에 그치지 않았다. 대동법은 조선 후기 상공업과 시장 경제 발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방 토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던 공납제 시절에는 중앙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만드는 관영 수공업 이외의 민간 수공업은 발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베와 쌀만 조세로 수취하는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중앙 관청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때 공인(貢人)이라는 민간 상인에게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물품을 조달하도록 했다. 그래서 공인 계층은 관청과 민간 수공업을 중계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관청에 납품할 물건을 주로 한양의 시전(市廛)이나 지방의 장시(場市)들을 통해 조달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민간 수공업자들과 거래하거나 직접 수공업장을 개설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시장경제가 크게 성장했고 상공업 활동은 활발해졌다.

일반 백성들 역시 쌀이나 베를 마련해 조세를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생산한 다른 여러 농산물이나 물품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은 상업적 농업을 경험하거나 상품 교환 경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시장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동법은 이렇듯 조선 후기 농업, 수공업, 상업의 생산 및 교환 활동을 자극하면서 상품과 시장경제의 싹을 틔웠다.

대동법 같은 개혁정책으로 양대 전란의 후유증을 말끔히 털어 내고 새롭게 사회 경제적 활력과 성장 동력을 찾았기 때문에 조선은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들어와 경제 부흥과 문화 융성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필자가 대동법을 가리켜 ‘조선 최고의 개혁정책’이라고 치켜세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동법은 100년 앞을 내다본 정책이었다. 그리고 그 정책은 김육이 평생 호로 삼았던 잠곡에서의 삶이 준 위대한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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