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재(慕齋) 김안국…부모에 대한 사모·추모의 뜻과 마음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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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재(慕齋) 김안국…부모에 대한 사모·추모의 뜻과 마음 담아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3.03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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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의 자호(字號) 소사전㉘
▲ 김안국과 이언적이 함께 제향된 경북 의성군 빙계서원.

[한정주=역사평론가] 자(字)는 국경(國卿). 김굉필의 제자로 조광조·기준 등과 함께 사림파의 도학정치(道學政治)와 개혁정치를 선도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와 뜻을 함께 한 사림의 젊은 인사들이 화를 입을 때 겨우 죽음을 면했으나 파직되자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가 후학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기묘사화 때 희생당한 사림의 명사(名士)들을 일컫는 이른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존경받았다. 이후 복직되어 대사헌과 대제학 등을 지내며 사림파의 재건과 성장에 크게 공헌했다.

그가 호를 ‘모재(慕齋)’로 한 까닭은 『중종실록』 38년(1543년) 1월4일자 기사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김안국은 의성(義城) 사람인데 성품이 부지런하며 정성스럽고 깨끗했다. 일곱 살 때 처음 『소학(小學)』을 읽다가 ‘효성스럽구나! 민자건이여’라는 구절을 보았다.

이에 즉시 ‘사람은 마땅히 이 구절로 법칙을 삼아야 한다. 나는 언제 장성해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까?’ 라고 말하니 듣고 있던 사람들이 기이하게 생각했다.

나이 스무 살이 못 되어 연이어 부모님을 잃었다. 마침내 ‘모재(慕齋)’라 자호(自號)하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섬기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나갈 때나 들어올 때에 반드시 부모님 영전에 고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제사를 올렸다. 조금이라도 의례(儀禮)와 같지 못할 경우에는 하루 종일 즐거워하지 않았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김안국이 부모님에 대한 사모(思慕)와 추모(追慕)의 뜻과 마음을 담아 지은 호가 ‘모재(慕齋)’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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