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星湖) 이익③…평생 거처했던 별빛 아름답게 비추는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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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星湖) 이익③…평생 거처했던 별빛 아름답게 비추는 호수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3.09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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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㉘
▲ 이익은 당쟁의 여파로 가족들을 잃고 입신양명의 꿈을 버렸다. 대신 수많은 제자들과 토론하며 실학을 만들어 나갔다.

[한정주=역사평론가] 이익의 집안은 남인의 명문가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는 태어날 때부터 당쟁의 피바람을 온 몸으로 겪어야 했다.

그의 아버지 이하진은 숙종 때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大司憲)을 지낼 만큼 남인을 대표하는 거물급 인사였다.

이하진은 이익이 태어나기 2년 전인 1679년 당시 남인 청남파(淸南派)의 영수였던 허목이 사직하고 조정을 떠날 때, 이를 적극 만류하고 나섰다가 정쟁에 휘말려 외직인 진주목사로 좌천되어 나갔다.

그런데 1680년(숙종 6년) 남인이 대거 숙청당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났다. 이때 이하진은 진주목사에서 파직을 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안도 운산(雲山)으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익은 1681년 10월18일 아버지가 귀양살이하던 운산에서 출생했다. 불행한 탄생이었다. 게다가 이익이 태어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1682년 6월14일 아버지 이하진은 유배지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이익은 강보에 쌓여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선대로부터 집안의 터전이 되어 온 광주(廣州: 현재 경기도 안산)의 첨성촌(瞻星村)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익은 평생토록 첨성촌에서 지냈다.

특히 이익은 친족인 모보(某甫)라는 이에게 지어준 ‘육오소와기(恧烏小窩記)’라는 글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첨성촌의 집이 ‘성호지빈(星湖之濱)’, 곧 성호라고 불리는 호수가에 자리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바로 안산 첨성촌의 집 옆에 있던 별빛이 아름답게 비추는 호수인 ‘성호(星湖)’를 자호(自號)로 삼았다.

이익이 평생 거처했던 곳의 지명을 취해 호로 삼고 또한 성호 이외에 다른 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사망한 후 기록을 남긴 조카 이병휴와 제자 윤동규 그리고 정조 시대 남인의 영수였던 채제공 등 여러 사람의 신뢰할 만한 증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선생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익(瀷)이며 자(字)는 자신(子新)이다. 광주(廣州)의 첨성(瞻星)에 살았다. 이러한 까닭에 성호(星湖)라고 자호(自號)하였다.” 이병휴, 『성호전집』, ‘가장(家狀)’

“선생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익(瀷)이며 자는 자신(子新)이다. 광주(廣州)에 자리한 선조(先祖)의 묘소 아래 첨성리(瞻星里)에서 살았다. 그래서 성호(星湖)라고 자호(自號)하였다.” 윤동규, 『성호전집』, ‘행장(行狀)’

“선생의 이름은 익(瀷)이고 자(字)는 자신(子新)이며 성은 이씨(李氏)이다. 광주(廣州)의 첨성리(瞻星里)에 은거하면서 도리를 닦으셨다. 이 때문에 성호(星湖)라고 자호(自號)하였다.” 채제공, 『성호전집』,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은 이익에게 정신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둘째 형 이잠(李潛)이었다.

11세가 되는 1692년(숙종 17년) 무렵부터 이잠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한 이익은 입신양명에 뜻을 두고 온 힘을 쏟아 경학(經學)과 과거공부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26세가 되는 1706년(숙종 32년) 9월 아버지의 죽음에 이어 다시 찾아온 큰 불행이 청년 이익의 꿈을 처절하게 짓밟아 버렸다.

어렸을 때부터 이익에게 아버지이자 스승 역할을 했던 둘째 형 이잠은 이때 예전에 세자(장희빈 소생으로 훗날의 경종) 책봉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태도를 다시 논박하고 김춘택 등 권·척신(權戚臣)이 임금의 위세를 업고 조정을 장악한 채 신하들을 협박하여 사방에서 세자에게 칼날을 겨누고 있다는 요지의 상소(上疏)를 했다.

그러나 이미 남인을 내친 숙종은 이잠의 상소가 남인의 잔당이 노론의 대신을 모함해 죄망(罪網)에 몰아넣는 것이라 여기고 이잠을 잡아들인 다음 친히 국문했다.

당시 이잠이 벼슬하지 않은 유학자(儒學者)의 신분이었음에도 대역 죄인을 다룰 때나 하는 친국(親鞫)을 한 사실로만 보아도 숙종과 노론의 대신들이 얼마나 이성을 잃고 분노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잠은 무려 18차례에 걸친 혹독한 고신(拷訊)을 당했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버티다가 끝내 장살(杖殺)당하고 만다.

아버지에 이어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따랐던 둘째 형 이잠 마저 당쟁의 칼바람 앞에 무참하게 살육당하자 이익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과거 공부나 벼슬에 나갈 뜻을 버린 것도 이때였다.

이때부터 죽음을 맞는 1763년까지 무려 57년간 이익은 성호 가의 집 성호장(星湖莊)에 몸을 의탁한 채 독서와 사색과 저술을 일생의 소임으로 알고 살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익은 이전 시대 조선의 어떤 지식인도 밟지 않은 학문의 영역을 섭렵했고,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지식의 경지에 올랐다.

성호장에서 이익은 시간적으로는 고대와 당대, 공간적으로는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학문과 사상을 연구했고 모든 방면에 걸친 백과사전적인 지식 탐구와 전방위적인 정보 검색을 통해 명실상부한 실학의 일인자이자 큰 스승으로 우뚝 솟았다.

반세기에 걸친 이익의 지적 작업은 앞서 언급했듯이 나이 80세 때 집안의 조카이자 제자들이 정리해 편찬한 『성호사설』에 고스란히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훗날 안정복이 ‘천해지심광야(天海之深廣也: 하늘과 바다처럼 깊고 넓다는 뜻)’라고 밝혔을 만큼 이 책은 18세기 조선의 지식인이 도달한 학문과 지식의 넓이와 높이 그리고 깊이를 보여주는 명저 중의 명저다.

이익은 이 책에 스스로 ‘서문(序文)’을 지어 자신이 학문하는 뜻을 이렇게 밝혔다.

“『성호사설』은 성호 노인의 희필(戱筆)이다. 성호 노인이 이 책을 지은 것은 무슨 뜻에서일까? 특별한 뜻은 없다. 뜻이 없었다면 왜 이 책이 만들어졌을까? 성호 노인은 한가로운 사람이다. 독서의 여가를 틈타 전기, 제자백가서, 문집, 문학, 해학이나 웃고 즐길 만한 것들을 붓이 가는 대로 적었다. 이렇게 많이 쌓였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처음에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기록하게 되었는데, 훗날 제목별로 나란히 늘어놓고 보니 다시 열람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문별(文別:「천지문」·「만물문」·「인사문」·「경사문」·「시문문」 등)로 분류해 드디어 한 질의 책을 만들었다. 이에 이름이 없을 수 없어서 ‘사설(僿說)’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또한 이익은 ‘육영재(六楹齋)’라고 명명(命名)한 성호장의 바깥채에서 집안의 조카들과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약용은 1801년 신유사옥 때 천주학의 수괴이자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한 이익의 종손(宗孫)이자 제자였던 이가환의 전기라고 할 수 있는 일명 ‘정헌묘지명’을 비밀리에 썼다.

여기에서 정약용은 이가환의 학문이 모두 이익의 가학(家學)에서 나왔다고 소개하면서 “우리 성호 선생은 하늘이 보내신 특출한 호걸이다. 도덕과 학문이 고금(古今)을 초월했고, 집안의 자제와 제자들 모두 대학자가 되었다. 일찍이 한 사람의 문하에서 학문의 융성함이 이러한 사례는 없었다”고 밝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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