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의 몸놀림…우연성과 마주침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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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의 몸놀림…우연성과 마주침의 철학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3.09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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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㉖

[한정주=역사평론가] 무더운 여름날 저녁 콩꽃 핀 울타리 가를 걷다가 기와 빛을 띤 거미가 실을 뽑아 거미줄을 엮는 모습을 보았다. 그 신묘한 모습이 부처와 서로 통함을 깨달았다.

실을 뽑고 실을 당기며 다리를 움직이는 방법이 너무나 기막혔다. 때로는 멈춘 듯하다가 때로는 순식간에 거미줄을 엮기도 했다.

마치 사람들이 보리를 심을 때의 발놀림이나 거문고를 튕길 때의 손놀림과 같았다. (재번역)

暑月之夕 步荳花籬畔 玩瓦色珠結絲 妙悟可以通佛 産絲汲絲 股法玲瓏 有時遅疑 有時揮霍 大畧如蒔麥之踵 按琴之指. 『선귤당농소』

박지원이 어느 날 홍대용의 집에 갔다. 그날 밤 김억이 왔다. 홍대용이 가야금을 타자 김억이 거문고로 화답했다.

밤이 깊어가자 떠다니는 구름이 사방에서 얽혀 후덥지근한 기운이 잠깐이나마 물러갔다. 그러자 거문고를 타는 소리가 더욱 맑게 들려왔다.

바로 그 순간 박지원은 이덕무가 언젠가 처마 사이에서 왕거미의 거미줄 치는 모습을 보고 했던 말을 떠올린다.

“절묘하더군요! 때로 머뭇거리는 것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고, 때로는 재빨리 움직이는데 무언가를 깨달은 듯 보였습니다. 파종한 보리를 발로 밟아 주는 모습과도 같고, 거문고 줄을 손가락으로 눌러 연주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박지원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홍대용이 김억과 어울려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이덕무가 말한 뜻을 깨우친다.

하나의 기억이 또 다른 풍경과 우연히 조우(遭遇)할 때 뜻밖의 깨달음을 얻곤 한다. ‘우연성’과 ‘마주침’의 철학이다.

박지원이 쓴 ‘하야연기(夏夜讌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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