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암(順菴) 안정복①…“천하의 일은 순리(順理)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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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順菴) 안정복①…“천하의 일은 순리(順理) 뿐이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3.16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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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㉙
▲ 순암 안정복의 초상.

[한정주=역사평론가] 『동사강목』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안정복은 이익의 수제자로 이익 사후 성호학파를 이끈 인물이다.

이익은 안정복을 평생 제자이자 벗으로 대했고 필생의 역작(力作)인 『성호사설』을 특별히 부탁할 만큼 그를 신뢰하고 아꼈다.

안정복은 이익이 세상을 떠난 직후 올린 제문(祭文)에서 남달랐지만 각별했던 사제지간의 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아! 슬프도다. 소자(小子)가 선생님의 문하에 이름을 의탁한 18년 동안 비록 얼굴을 뵙고 가르침을 받은 적은 드물었지만 손수 편지를 써서 깨우쳐주신 것은 빈번하였습니다. 『소학』과 『시경』과 『예기』를 부지런히 읽으라고 권해주셨고 재주와 재능을 안으로 갈무리하고 이름과 명예를 함부로 드러내지 말며 실질에 힘쓰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경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비록 선생님께서는 부지런히 가르치고 이끌어주셨지만 소자는 오히려 아직도 어리석음을 깨우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은혜가 깊고 사제 간의 의리는 무거워서 두려운 마음을 간직하고 몸가짐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소자가 『동사강목』을 편찬할 때에 이르러서는 조금의 여분도 남기지 않고 헤아려 지도해주셨습니다. 강역(疆域)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미처 확정하지 못했을 때나 의리(義理)가 은밀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에 대해서까지 모두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성호사설』에 대해서는 어리석고 어두운 소자가 외람되이 부탁을 받았으니 땅을 짊어진 것처럼 무겁고 바닷물을 담고 있는 것처럼 크며 의리는 끝이 없습니다. 비록 가리고 뽑아서 간행하라는 가르침을 주셨지만 소자의 좁은 소견으로 어찌 하늘과 바다처럼 깊고 넓은 선생님의 학문과 식견을 들여다보고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열권의 책을 만들고 단장해서 장차 선생님께 올리려고 했는데 책이 미처 이루어지기도 전에 부음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제 남기신 책을 부둥켜안고 슬픔만 더할 뿐입니다.” 『순암집』, ‘성호 선생에게 올리는 제문(祭星湖先生文)’

안정복이 25세 되는 1736년(영조 12년)에 처음 사용한 호는 순암(順菴)이다.

나이 15세 때 관직에서 물러난 할아버지를 따라가 전라도 무주(茂朱)에서 살았던 안정복은 24세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다음해(1736년) 10월 조상의 선영이 자리하고 있는 경기도 광주(廣州) 경안면(慶安面) 덕곡리(德谷里)로 이주했다.

이때 안정복은 ‘암(菴)’자 모양으로 집을 짓고 ‘순암(順菴)’이라고 이름 붙였다. ‘천하의 일은 오직 순리(順理)일 뿐이다’라는 뜻을 취해 지은 이름이었다.

안정복의 제자 황덕길이 쓴 ‘순암선생행장(順菴先生行狀)’에는 이러한 사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광주(廣州)의 덕곡(德谷)은 골짜기가 그윽하고 숲이 우거진 데다 산의 물이 빙빙 휘감고 돌아 흘러서 은자(隱者)가 터를 잡아 거처할 만한 곳이다. 더욱이 그곳에는 선대(先代)부터 가꾸고 기른 소나무와 가래나무가 무성한 땅이 있었다.

선생은 마침내 그 땅에 복거(卜居)할 뜻을 정하고 조그마하게 집을 세웠다. 집은 ‘암(菴)’자 형상으로 지었고 ‘순암(順菴)’이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무릇 ‘천하의 일은 오직 순리(順理)일 뿐이다’는 뜻을 취해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이에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오로지 옛사람의 학문하는 뜻에 따라 온 힘을 쏟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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