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암(來庵) 정인홍…산림지사 vs 살인귀 ‘극과 극 오간 평가’
상태바
내암(來庵) 정인홍…산림지사 vs 살인귀 ‘극과 극 오간 평가’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3.18 14: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선비의 자호(字號) 소사전㊶
▲ 내암 정인홍의 초상.

[한정주=역사평론가] 자(字)는 덕원(德遠). 남명 조식의 수제자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맹활약했고 광해군 즉위 후 집권한 북인의 정치적·학문적 수장이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서인 세력에 의해 대역 죄인이자 패륜의 주범으로 몰려 철저하게 매장당했다.

그의 삶과 정치 행적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조식의 학통을 이은 산림(山林)의 지사(志士)였다는 평가에서부터 무자비하고 잔혹한 정치가이자 역적이라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을 오가고 있다.

특히 광해군 때 권신(權臣)이자 간신(奸臣)이었던 이이첨의 정치적 스승이자 후견인으로 자주 묘사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반대 당파나 정적에게 비타협적이고 잔인한 살인귀의 이미지로 종종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정인홍이 호에 남긴 뜻을 보면 그가 스승 조식의 ‘출처(出處) 철학’대로 권력과 명예에는 큰 욕심이 없었고 오히려 벗을 사귀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을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 알고 지냈음을 엿볼 수 있다.

거칠고 볼품없는 초막을 뜻하는 ‘내암(萊菴)’이라는 호(號)나 ‘믿음을 가지고 술을 마신다면 허물이 없다’는 뜻을 담고 있는 ‘부음정(孚飮亭)’이라는 당호(堂號)에서 볼 수 있듯이 정인홍은 스승 조식을 좇아 산림처사로 지내면서 벗을 사귀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을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아 살고 싶어 했다.

다만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도 광해군과 운명을 함께 했던 북인 정권의 실질적 수장이었기 때문에 광해군의 몰락과 서인의 권력 장악 이후 역적의 굴레와 실정(失政)·패륜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