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암(順菴) 안정복④…유학자로 살다 유학자로 죽기를 바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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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順菴) 안정복④…유학자로 살다 유학자로 죽기를 바라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3.23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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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㉙
▲ 안정복이 저술한 강목체·편년체 역사서 『동사강목』. 원내는 순암 안정복.

[한정주=역사평론가]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먼저 안정복이 순암 이외에 사용했던 또 다른 호인 ‘영장산객(靈長山客)’에 대해 살펴보자.

안정복의 생애를 살펴볼 때, 이 호가 중요한 까닭은 그가 자전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영장산객전(靈長山客傳)’을 통해 반평생을 갓 넘은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 덕곡리에 있던 영장산은 안정복이 ‘순암’이라는 호에 특별히 뜻을 새길 만큼 정성을 다해 모신 조상의 선영이 있던 성지(聖地)였다.

“객(客)은 광주(廣州) 사람이다. 성(姓)은 아무개이고, 이름은 아무개이며, 자(字)는 아무개이다. 그 자(字)인 백순(百順)으로 말미암아 거처하는 집에 순(順)이라고 편액하고 ‘천하의 일은 순리(順理)일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영장(靈長)은 산의 이름이다. 영장산 속에서 독서하며 ‘영장산객(靈長山客)’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어려서는 병을 안고 살아 괴로웠지만 장성해서는 배움을 좋아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배움에 스승과 벗이 없어서 오직 마음이 가는 대로 백가(百家)의 서책을 두루 보았다. 관중(管仲)과 상앙(商鞅)에서부터 손자(孫子)·오기(吳起)·감공(甘公)·석신부(石申夫)·경방(京房)·곽박(郭璞)·순우의(淳于意)·편작(扁鵲) 등에 이르기까지 그 서책을 다 연구하느라 몇 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소득이 없었다. 뒤늦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오히려 시원하게 버리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26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典)』을 얻어 읽었고 비로소 이 학문이야말로 귀(貴)한 것임을 알고 ‘자신의 집에 무진장(無盡藏) 있는 것은 버려두거나 잊어버린 채 그릇을 들고 남의 대문 앞에서 비렁뱅이 짓을 하였으니 옛사람이 먼저 내 마음을 알아버린 말이 아니겠는가!’라며 탄식하였다. 마침내 그 학문을 손수 베끼고 입으로 외웠다.

성리학을 배우는 한편으로는 역대의 사서(史書)를 다스려 치란(治亂)의 자취를 연구하고 안위(安危)의 조짐을 살펴보고 제작(制作)의 근원을 분별하고, 시비(是非)의 단서를 가려보았다. 이렇게 하기를 또한 여러 해 동안 그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내면(內面)을 향한 공부가 또한 전일(專一)하지 않았다. 두루 널리 보는 바람에 비록 얻은 것은 없었지만 말과 글로 드러내면 더러 볼만한 것도 있고 더러 들을 만한 것도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뜻을 함께 한 선비들은 간혹 실질을 갖추었다고 했지만 대개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로 인해 허명(虛名)으로 세상을 속이게 되고 말았다.

기사년(己巳年: 1749년) 여름 천거되어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겨울에 다시 만녕전참봉(萬寧殿參奉)에 제수되자 헛되게 이름을 탐하는 것으로 보일까 두려워 임금의 명에 따랐다. 그러나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신미년(辛未年: 1751년) 2월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로 승진하고, 임신년(壬申年 : 1752년) 2월에는 정릉직장(靖陵直長)으로 승진하고, 계유년(癸酉年: 1753년) 10월에는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로 승진하고, 갑술년(甲戌年: 1754년) 2월에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자리를 옮겨 품계가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다. 모두 순서에 따라 벼슬이 오른 것이었다.

그해 6월 부친상을 당해 영장산의 옛집으로 돌아와서 여막을 지켰다. 그런데 병이 나자 죽음을 맞을 뜻을 품고서 문을 닫아걸고 교류를 끊은 채 한 마음으로 운명만을 기다렸다. 이때 나이 43세였다.

영장산객은 평소 제갈량(諸葛亮)과 도연명(陶淵明)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그러나 진수(陳壽)가 저술한 『삼국지(三國志)』와 진송(晉宋) 시대의 전기(傳記)는 상세함과 간략함이 서로 겹쳐있고 빠진 것과 어긋난 것이 실제로 많다고 여겨 마침내 두루 채집해 두 사람의 전기(傳記)를 새로 지었다. 항상 암송하고 읽으면서 마치 그들을 만나기나 한 듯이 기뻐하며 즐거워했다. 그들의 자취를 본받아 뽕나무 팔백 그루와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집의 오른편과 왼편에 심었다.

그런데 뽕나무 육백 그루가 말라죽고 버드나무도 한 그루가 시들어버렸다. 일찍이 웃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망령되게도 옛사람이나 된 것처럼 행동했는데 사물도 다르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제갈량에게는 4분의 3이나 미치지 못하고, 도연명에게는 5분의 1이나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데 내가 누구를 속이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글을 읽을 때는 항상 큰 뜻을 볼 뿐 깊게 해석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역시 제갈량과 도연명을 사모한 것이다.

자질과 성품은 보잘것없고 어두우며 허술하고 우활하여 백 가지 중에 한 가지도 능숙한 것이 없다. 다만 한 가지 스스로 허여(許與)한 것은 다른 사람의 선한 것을 보면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능숙한 것을 보면 자신을 굽혀 배우기를 소원하는 것이었다. 사물을 대하면 거스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나무라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이 다른 사람과 얼굴빛을 붉힌 적이 없었다.

벼슬살이한 5년 동안에도 주어진 임무와 본분을 지키느라 분주(奔走)했지만 단 한 사람도 때린 적이 없었다. 또한 개인적인 이익이나 욕심을 위해 공(公)적인 것을 해치지 않았고, 옛것을 고집해 세상의 풍속과 어긋나는 행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은 그 간편함을 즐거워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 평이함을 좋아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처세를 잘한다고 비난했지만 역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집이 빈곤해 서책은 없었지만 기록하고 서술하는 것을 즐겨 사라지거나 잊어버리는 것에 대비했다. 그러나 문장을 짓는 것만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 또한 문사(文辭)에 자신의 단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저술이 대바구니에 가득 찼지만 미처 다 탈고(脫藁)하지 못한 것들이다. 비록 연석(燕石)처럼 스스로는 진귀하다고 하지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들로 심력(心力)만 낭비했을 뿐 요긴(要緊)하지도 않은 것이 어지럽게 많기만 하다.

야사씨(野史氏)는 말한다. 내가 영장산객의 마을 사람들을 따라가 그의 사람됨에 대해 자세하게 들어보았다. 깊숙한 곳에 거처하며 드물게 세상에 나오는 것은 수련(修鍊)하는 자와 유사하다. 향리(鄕里)에 머무르면서 세상 풍속에 따르는 것은 향원(鄕愿)과 유사하다. 마음에 큰 뜻을 품었다고 자부하면서 옛사람을 말하는 것은 미치광이와 유사하다. 다른 사람에게 구하는 것이 없는 것은 절개가 있는 사람과 유사하다. 항상 종일토록 서책을 보는 것은 학문하는 사람과 유사하다. 더러 눈을 감고 고요하게 앉아 있는 것은 선(禪)을 배우는 사람과 유사하다.

미천하고 나약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몸을 굽히는 것은 노씨(老氏 : 노자)에게서 얻는 사람과 유사하다. 운수에 미루어 짐작하고 운명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장주(莊周)에게서 깨달음을 얻는 사람과 유사하다. 그 말이 박식하고 잡다해서 요령을 얻기가 어렵다. 그 박식한 것을 요약해 한 가지로 귀결시킨다면 거의 어긋나지 않게 될 것임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성품이 간략하고 졸렬하여 일찍이 다른 사람과 교유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한 사람을 사귀는 것은 한 사람을 끊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서로 왕래하는 사람이 없어서 오솔길에 풀만 무성하게 자라 그늘이 질 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삶을 마쳤으니, 어쩌면 숨어 지낸 선비의 풍도(風道)를 들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순암집』, ‘영장산객전’

‘영장산객’이라는 호는 안정복이 43세 때인 1754년에 지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안정복은 이보다 3년 후인 46세 때 스승 이익에게 ‘순암기’를 지어달라고 청했다.

안정복이 순암이라는 자호를 처음 사용한 것은 나이 25세 때였다. 이렇게 보면 안정복은 ‘영장산객’이라는 호를 지은 이후에도 ‘순암’이라는 호를 계속해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안정복의 삶에서 ‘순(順)’이라는 글자에 새긴 뜻이 얼마나 컸는가에 대해서는 그의 자(字)가 ‘백순(百順)’이라는 사실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백(百)’이란 ‘일백’이 아닌 ‘모든’이라는 뜻을 갖는다. 세상의 모든 일을 오로지 ‘순(順)’이라는 글자의 뜻 속에서 찾으려고 한 안정복의 강렬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여하튼 ‘영장산객전’은 성리학의 그늘 속에서 하학(下學)과 박학(博學)을 추구했던 안정복의 학문세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일찍이 하학(下學)에 뜻을 두었지만 『성리대전(性理大典)』을 얻어 읽은 다음에는 성리학이야말로 진실로 귀(貴)한 학문임을 알고 평생 손으로 베끼고 입으로 외웠다는 이 자전적 기록을 통해 이익 사후 그가 서학과 천주교 그리고 양명학에 심취했던 성호학파의 좌파와 왜 그토록 극심하게 갈등과 대립을 빚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이익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안정복의 정신세계에 자리하고 있던 성리학의 뿌리는 그토록 깊고 질겼던 것이다. 특히 안정복은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영장산 아래에 이택재(麗澤齋)라는 재실(齋室)을 짓고 조상을 정성껏 모시는 한편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학(講學)의 공간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과 “영장산 속에서 독서하며 ‘영장산객’이라고 자호하였다”는 안정복의 말을 비교해보면 그의 학문과 삶의 지향점이 무엇이었는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다. 그는 성호학파를 일컫는 서학파(西學派)의 일원이 아니라 유학자로 살다가 유학자로 죽기를 바랐던 것이다.

안정복은 이익에게 가학(家學)을 전수받은 가계(家系) 측의 수제자인 이병휴가 타계한 1776년 나이 65세 이후부터 실질적으로 성호학파를 이끌었다. 그러나 안정복은 스승의 빈자리를 대신하지는 못했다.

1780년대 들어 성호학파는 유학의 경전 해석과 서양 문물을 수용하는 태도와 방식을 둘러싸고 의견을 달리하면서 우파(보수파)와 좌파(진보파)로 분열되었다. 당시 안정복은 우파의 수장으로 좌파를 맹렬하게 비난하고 공격했다. 심지어 1786년에는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에게 편지까지 보내 함께 힘을 합해 ‘천주교의 확산과 전염’을 막자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서양의 학문과 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천주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때로는 동조하기까지 했던 이익의 높고 깊고 넓은 학문세계와 정신세계를 따라가기에는 안정복의 삶과 철학에 드리운 유학과 성리학의 그늘은 너무도 짙고 어두웠다.

말년에 접어들수록 안정복은 녹암 권철신을 따르는 성호학파의 젊은 세대들이 천주교나 양명학에 심취하는 상황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몹시 분개했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주자학이 사학(邪學)이나 이단이라고 배척한 학문과 사상까지 포용할 정도로 자유롭고 개방적이었던 이익의 학풍은 크나큰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곧 주자학과 서학, 폐쇄와 개방,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18세기 조선 지식 사회의 위기이기도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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