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沙溪) 김장생…사망 이후에도 혼과 정신 머문 충남 논산 사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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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沙溪) 김장생…사망 이후에도 혼과 정신 머문 충남 논산 사계천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3.27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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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의 자호(字號) 소사전㊽
▲ 사계 김장생의 영정.

[한정주=역사평론가] 자(字)는 희원(希元). 처음 예학(禮學)의 대가인 구봉 송익필의 문하에서 배우다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 나아가 성리학을 배웠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성리학의 큰 흐름을 예학(禮學)으로 바꾸어놓았다.

그의 문하에는 아들 김집을 비롯해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강석기(姜碩期), 장유, 최명길(崔鳴吉) 등 한 세기를 지배한 학자와 문사와 정치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자신을 비롯해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무려 네 사람이 동방18현(東方十八賢)으로 뽑혀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것은 그의 학통을 계승한 제자들이 17세기 이후 조선의 정치와 학문의 권력을 한손에 움켜쥐고 좌지우지한 서인 노론 계열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인의 영수나 다름없던 김장생은 1602년(선조 35년) 봄 북인의 영수 정인홍과 크게 갈등을 빚고 관직에서 해임된 후 한양을 떠나 연산(連山) 임리(林里: 현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사계천(沙溪川) 옆으로 거처를 옮긴 적이 있다.

당시 그의 나이 55세였다. 김장생의 ‘사계(沙溪)’는 바로 이곳의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김장생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그의 혼과 정신은 이곳 사계천에 계속 머물렀다. 김장생이 사망한 지 3년이 지난 1634년(인조 12)에 그를 추증한 돈암서원(遯巖書院)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240여년이 지난 1880년(고종 17년)에 이르러서 돈암서원 앞 사계천(沙溪川)의 흐름이 크게 바뀌어 담장을 침식해 붕괴의 위험에 처하자 남쪽으로 1리 가량 떨어져 있는 호계(虎溪)의 언덕에 터를 잡고 서원을 이건(移建)해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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