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燕巖) 박지원②…입신출세 버리고 선택한 ‘제비바위협곡(燕巖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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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燕巖) 박지원②…입신출세 버리고 선택한 ‘제비바위협곡(燕巖峽)’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3.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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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㉚
▲ 경남 함양 상림 역사인물공원에 조성된 연암 박지원 흉상.

[한정주=역사평론가]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년) 2월5일 새벽 한양의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 서소문 밖 풀무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영조 때 경기도관찰사, 대사간, 지돈령부사 등 최고위 관직에 올랐던 할아버지 박필균으로 인해 한양의 명문가로 이름을 떨쳤다. 이 때문에 박지원은 젊은 시절 여느 명문가의 자제들처럼 과거공부를 했고 과거시험용 문장을 익혔다.

그런데 일찍부터 호방한 기상과 포부를 지녔던 박지원은 과거공부를 하면서도 정작 과거시험의 합격여부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성균관의 과거시험장에 들어가면 한유나 두보의 고체시(古體詩)를 본떠 지은 시가 매우 뛰어나 주변 사람들이 그 특이하고 빼어난 시 구절을 외워 전할 정도였지만 오히려 그는 한 편의 글을 다 짓지도 않은 채 빈 답안지를 내고 나와 버리곤 했다.

과거시험을 통한 입신과 권세가에 빌붙어 출세하는 것에 전혀 마음을 주지 않았던 박지원의 뜻은 나이 30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당시 그가 품었던 이러한 뜻은 『과정록』에 소개되어 있는 두 가지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사례는 1767년 박지원의 나이 31세 때 세 들어 살던 삼청동 백련봉(白蓮峯) 아래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박지원이 살았던 셋집은 대장(大將) 이장오의 별장이었다. 이 때문에 날마다 이장오를 찾아온 수많은 손님들이 또한 문장을 잘 짓고 언변과 화술이 뛰어난 박지원을 즐겨 찾아오곤 했다. 눈 오는 아침이나 비 오는 저녁에도 말을 나란히 타고 술병을 들고 찾아와 빈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글을 짓고 사람을 사귀는 일을 좋아했던 박지원은 항상 기쁜 마음으로 이들을 맞이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자신을 자기 당파(黨派)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지원은 자신을 찾아온 이들의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몹시 불쾌하게 여겼고 이후 더욱 사람들과의 왕래를 끊고 초연히 세상을 벗어나려는 뜻을 확고히 했다고 한다.

두 번째 사례는 이보다 3년 후인 1770년 나이 34세 때 과거시험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박지원은 소과(小科)인 감시(監試)에 응시해 초장(初場)과 종장(終場)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했다. 박지원의 문재(文才)에 탄복한 영조는 특별히 침전(寢殿)으로 입시하라는 어명을 내리고 도승지로 하여금 시험 답안지를 읽게 하였다.

이때 영조는 손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춰가며 듣고 나서 박지원에게 크게 격려하는 말까지 남겼다. 그래서 당시 시험을 주관하던 벼슬아치들은 박지원을 반드시 대과(大科)인 회시(會試)에 합격시켜 자신의 공적으로 삼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을 감지한 박지원은 아예 회시에 응시하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의 처신이 자칫 임금의 찬사와 이에 편승하는 벼슬아치들에 의지해 과거급제하고 입신출세하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들의 강력한 권유를 차마 뿌리칠 수 없어 억지로 회시에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험장에 들어간 박지원은 정작 답안지는 제출하지 않고 나와 버렸다. 이 일로 사람들은 박지원이 구차하게 벼슬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다.

이 과거시험장의 해프닝 이후 박지원은 과거를 볼 마음을 완전히 접어버렸다. 그리고 나라 안의 명산과 명승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호방한 기운과 고매한 기상을 길렀다.

훗날 박지원은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과거공부를 일찍 그만두었기 때문에 마음이 한가로웠고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대신 산수 유람을 많이 했다”라고.

오늘날까지도 박지원의 이름 앞에 늘 따라 다니는 ‘연암(燕巖)’을 자호로 삼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과거에 대한 뜻을 깨끗이 버리고 거리낌 없이 산천이나 돌아다닐 마음을 먹은 박지원은 다음해인 1771년 곧바로 개성 유람에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개성 부근의 장단 보봉산에 있던 화장사(華藏寺)에 올랐다. 이때 동쪽으로 아침 해를 바라보다가 마치 산봉우리가 하늘에 꽂힌 듯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별천지가 있겠다는 생각에 박지원은 동행한 백동수와 한달음에 그곳으로 가보았다. 초목이 우거지고 길도 나있지 않아 겨우 골짜기에 흐르는 개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보니 짐작한 대로 기이한 땅이 나타났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그곳의 풍경을 “언덕은 평탄했고 산기슭은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바위는 희고 모래흙은 환하게 빛났다. 깎아지른 듯 서 있는 푸른 절벽은 마치 그림 병풍을 벌려놓은 것과 같은 형세를 하고 있었다. 개울에 흐르는 물은 깨끗하고 맑아서 그 속이 들여다보이고 너럭바위는 평평하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 한가운데는 반듯하고 잡풀이 무성한 빈 땅은 널찍했다”라고 묘사했다.

물 맑고 산세 수려한 길지에 마땅히 집을 지어 살 만 한 널찍한 땅까지 발견한 박지원의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컸다.

당시 박지원이 발견한 곳은 개성에서 30 리 떨어져 있는 두메산골인 황해도 금천군의 일명 ‘제비바위 협곡’, 곧 ‘연암협(燕巖峽)’이었다.

박지원은 이 수려하고 기이한 땅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래서 장차 이곳에 집터를 닦아 살겠다는 마음을 먹고 마침내 그곳에 우뚝하고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던 ‘제비바위’, 즉 ‘연암(燕巖)’을 취해 자호로 삼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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