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燕巖) 박지원③…다시 옮길 수 없는 땅 ‘연암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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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燕巖) 박지원③…다시 옮길 수 없는 땅 ‘연암협’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0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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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㉚
▲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묶은 문집 『연암집』. 원안은 연암 박지원의 초상.

[한정주=역사평론가] 박지원은 연암협에 집을 짓고 형제들과 함께 모여 살면서 손수 농사짓고 독서하며 저술하는 삶을 꿈꾸었다.

박지원은 자신이 꿈꾸었던 연암협에서의 삶을 훗날 큰 형수가 사망한 후 지은 ‘백수공인이씨묘지명(伯嫂恭人李氏墓誌銘)’에 이렇게 남겨놓았다.

“내가 화장산 속에 자리하고 있는 연암 골짜기에 새로이 집을 지어 거처할 곳을 정하였다. 그곳의 수석(水石)을 좋아하여 손수 무성한 가시덤불을 베어 내고 나무에 의지하여 집을 지었다.

일찍이 큰 형수를 마주하고 ‘우리 큰 형님은 이미 늙었습니다. 마땅히 아우와 함께 은거하셔야 합니다. 담장에는 빙 둘러서 천 그루의 뽕나무를 심고, 집 뒤편에는 천 그루의 밤나무를 심고, 문 앞에는 천 그루의 배나무를 접붙이고, 개울의 위와 아래에는 천 그루의 복숭아나무와 은행나무를 심겠습니다.

삼무(三畝)나 되는 연못에는 한 말이나 되는 어린 물고기를 기르고, 바위 벼랑에는 백 개의 벌통을 놓고, 울타리 사이에는 뿔 여섯 달린 소 세 마리를 매어두고, 아내는 길쌈하고 형수님은 단지 여종에게 들기름을 짜도록 재촉이나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밤에는 제가 옛사람의 글을 읽을 수 있도록 돌봐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다.” 『연암집』, ‘백수공인이씨묘지명’

그런데 연암협을 처음 발견할 때만 해도 박지원은 이곳에서 살 엄두를 쉽게 내지 못했던 듯하다. 워낙 길도 없는 두메산골인 데다가 집터를 살펴준 백동수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이 박지원에게 한양을 떠나 연암협에 거처하는 것은 100년도 되지 못하는 인생을 답답하게 갇혀 지내는 일이라면서 만류했기 때문이다.

“영숙(永叔: 백동수의 자)이 일찍이 나를 위해 금천의 연암협에 함께 가서 집을 짓고 살 만한 터를 보아주었다. 그곳은 산이 깊고 길이 험해 하루 종일 걸어도 사람 하나 만날 수 없었다.

함께 갈대밭 속에 말을 세워놓고 채찍을 휘둘러 높은 언덕을 나누어 정리하다가 말하였다. ‘저곳은 울타리를 치고 뽕나무를 심을 만하네. 불을 질러 갈대를 태우고 밭을 가꾸면 한 해 동안 곡식 천 석은 얻을 수 있겠구만.’

시험 삼아 쇠를 두드리고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불을 질렀다. 꿩이 ‘꺼겅꺼겅’ 울면서 놀라 날아오르고, 어린 노루가 눈앞에서 달아났다. 팔뚝을 걷어붙이고 뒤쫓아 갔지만 어린 노루가 개울을 건너자 돌아왔다.

이에 서로 보고 웃다가 ‘인생은 백 년도 되지 못한다. 어찌 답답하게 나무와 바위로 둘러싸인 곳에 살면서 곡식 부스러기나 주워 먹는 꿩이나 토끼 마냥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연암집』,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주는 글(贈白永叔入麒麟峽序)’

그러나 연암협을 발견한 지 7년이 지난 1778년 박지원은 뜻밖의 악연(惡緣)으로 말미암아 쫓기다시피 한양을 떠나 연암협에 터를 잡아야 했다. 정조가 즉위한 지 2년이 지난 이 해에 권신(權臣) 홍국영이 박지원을 해치려는 마음을 먹고 일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려 준 이는 유언호인데,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당시 이조참의에 있었다. 박지원의 아주 절친한 벗이었던 유언호는 평소 권세가(權勢家)를 과격하고 준엄하게 비판하는 박지원의 언행에 대해 행여 몸을 상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조정에서 퇴청하면서 박지원을 찾아왔다. 이날 유언호는 박지원의 손을 잡고 깊이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하려고 홍국영의 심기를 그렇게 크게 거슬렀는가? 자네를 미워해 깊이 독을 품고 있으니 닥쳐올 재앙을 예측할 수 없네. 그가 자네를 도모하려고 틈을 노린 것이 오래되었네. 자네가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 때를 늦추었을 뿐이네. 지금 흘겨보는 눈초리가 때가 다 한 것 같으니 장차 자네에게 재앙이 미칠 것이네. 자네에 대한 말에 이르면 매양 눈초리가 몹시 악랄해지니 반드시 화를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네. 어찌해야 하겠는가? 가능한 빨리 한양을 떠나게.”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유언호의 말을 들은 박지원은 스스로 ‘평소 뜻과 말이 곧고 바르며 헛된 이름이 세상에 너무 높게 드러난 것이 재앙을 부른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가족들을 이끌고 연암협에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그 즉시 한양을 떠났다.

그런데 박지원이 걱정되었던 유언호가 뒤이어 외직(外職)을 자청해 연암협 부근의 개성유수로 부임해왔다. 부임하자마자 연암협으로 박지원을 찾아온 유언호는 “수석(水石)은 참으로 아름답네. 그렇지만 흰 돌을 삶아먹을 수는 없지 않는가. 개성부(開城府) 안에 자네를 위해 애를 써줄 만한 친지는 있는가? 성곽 근처에도 세를 얻어 살 만한 집이 많다네. 왜 생각해보지 않았는가? 내가 개성부에 재직하면서 날마다 자네와 더불어 지낸다면 이 역시 기쁜 일이 아닌가”라고 했다.

두메산골인 연암협까지 찾아와 간곡하게 설득하는 유언호의 말을 차마 뿌리치지 못한 박지원은 개성부 안 금학동(琴鶴洞) 양호맹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로 인해 연암협에서의 생활은 잠시 뒤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유언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조참판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복귀하자 연암협으로 돌아온 박지원은 마침내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품어온 농사짓고 독서하며 저술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특히 큰 형수가 사망하고 연암협의 집 뒷산에 묻힌 이후부터 박지원은 이곳을 가리켜 ‘다시 옮길 수 없는 땅’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일찍부터 큰 형수를 어머니처럼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에 큰 형수의 묘 자리로 삼은 다음 연암협에 대한 박지원의 애정은 더욱 각별해질 수밖에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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