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김상헌…“맑고 깨끗하고 시원한 미음(渼陰)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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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김상헌…“맑고 깨끗하고 시원한 미음(渼陰) 마을”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0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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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의 자호(字號) 소사전(57)
▲ 겸재 정선의 ‘석실서원도’.

[한정주=역사평론가] 자(字)는 숙도(叔度). 병자호란 때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주전론(主戰論)과 척화론(斥和論)의 수장이다.

이로 인해 1640년(인조 18년) 71세의 노령임에도 당시 청나라의 수도였던 심양으로 압송되어 큰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정치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대명의리(大明義理)와 척화(斥和)의 상징으로 숭상받으면서 서인 노론 계열의 정치적·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의 호 ‘청음(淸陰)’은 ‘소나무나 대나무 등의 시원한 그늘’을 운치 있게 일컫는 말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가 은거지로 삼았던 ‘미음(渼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청음(淸陰)’은 ‘맑고 깨끗하고 시원한 미음(渼陰) 마을’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호 ‘석실산인(石室山人)’ 역시 미음(渼陰)과 관련이 있다. 지금의 미사리 일대 한강을 조선시대에는 미호(渼湖)라고 불렀다.

이 미호(渼湖)의 북쪽인 미음(渼陰) 부근(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1동 서원마을)에 김상헌의 은거지인 석실(石室)이 있었다. ‘석실산인’이라는 호는 바로 이 석실에서 비롯되었다.

김상헌이 오기 전 이곳의 지명은 ‘도둑골’이라는 뜻의 ‘적실(賊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상헌은 그 지명이 혐오감을 자아낸다면서 ‘석실(石室)’로 바꾸었다.

특히 김상헌 사후 그 후손들이 이곳을 세거지(世居地) 삼아 살면서 ‘석실서원(石室書院)’을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는 한편 집안의 자제들과 후학들을 가르치는 강학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이곳을 통해 17〜18세기 조선의 학계를 주도한 대학자와 문장가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이른바 ‘삼수육창(三壽六昌)’이라 불리는 그의 후손 아홉 명은 물론이고, 담헌 홍대용과 연암 박지원도 석실서원에서 김상헌의 후손인 미호 김원행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노가재연행록(老稼齋燕行錄)』의 저자 김창업 역시 석실서원에서 공부했던 김상헌의 후손이다.

조선의 3대 연행록(燕行錄)의 저자(김창업·홍대용·박지원)가 모두 석실서원 출신인 것만 보아도 당시 이곳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순조 이후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의 문을 연 김조순 역시 김상헌의 직계 후손이다. 다시 말해 19세기 초·중반 권력을 좌지우지한 세도가문 안동 김씨의 역사는 김상헌과 석실서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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