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燕巖) 박지원④…불후의 걸작 『열하일기』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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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燕巖) 박지원④…불후의 걸작 『열하일기』의 탄생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06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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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㉚
▲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표지(왼쪽)와 지난 2006년 새로 발견된 우리말 번역 필사본 본문.

[한정주=역사평론가] 연암협에서의 생활과 그곳의 자연풍경에 대해서는 박지원이 평생 가장 가까운 벗이자 동지로 여겼던 홍대용에게 보낸 편지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 편지를 읽다보면 그가 다른 사람에게 쉽게 꺼내놓기 힘든 심중(心中)의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털어 놓을 수 있었던 사람이 다름 아닌 홍대용이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아우가 연암협으로 들어와 언덕 하나와 골짜기 하나를 경영하며 살려고 마음먹은 지가 이미 9년이나 지났습니다. 물가에서 잠자고 바람을 맞은 채 밥을 먹으면서도 맨손으로 두 주먹만 쥐었을 뿐 마음은 지치고 재주는 서툴렀으니 무엇을 성취했겠습니까? 그저 자갈밭 몇 이랑에 초가삼간을 마련했을 뿐입니다. 허공에 매달려있는 듯한 비좁은 협곡에는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애초 오솔길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면 산기슭은 모두 숨어버리고 갑자기 형세가 바뀌어서, 언덕은 평평하고 기슭은 어여쁘며 흙은 하얗고 모래는 환히 빛납니다. 확 트여 넓은 곳에다 남쪽을 향해 집을 지을 형국(形局)을 잡았습니다. 그 집터가 지극히 작지만 천천히 걷거나 노닐면서 쉴 만한 장소가 그 가운데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앞쪽 외편에는 푸른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 있어서 마치 그림병풍을 펼쳐놓은 것과 같습니다. 바위틈은 깊숙이 입을 벌려 저절로 동굴을 만들고 제비가 그 속에 둥지를 틀었으니, 이곳이 바로 연암(燕巖: 제비바위)입니다.

집 앞으로 백여 걸음 떨어진 곳에 평평한 대(臺)가 있는데 모두 바위가 층층이 쌓여 우뚝 솟아 있습니다. 개울이 그 아래로 굽이돌고 있으니 바로 조대(釣臺)입니다.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하얀 바위가 평탄하게 펼쳐져 있어서 마치 먹줄을 대고 잘라놓은 것 같습니다. 더러 평평한 호수를 만들고 더러 맑은 못을 이루었는데 노니는 물고기들이 아주 많습니다. 매일 서쪽에 석양이 비쳐 띠를 두르면 그림자가 바위 위까지 어른거립니다. 이곳이 바로 엄화계(罨畵溪)입니다.

산이 휘감아 돌아들고 물길이 겹겹이 감싸 사방으로 촌락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큰길로 나가 7∼8리 정도 걸어야 비로소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지난 가을부터 불러 모은 이웃이라고 해봐야 불과 서너 가구일 따름이고, 그나마 모두 다 떨어진 옷에다 귀신같은 몰골을 하고 소란스럽게 떠들면서 오로지 숯을 굽는 일만 할 뿐 농사는 일절 짓지 않습니다. 깊은 골짜기에 사는 오랑캐가 호랑이나 표범을 이웃으로 삼고 족제비나 다람쥐를 친구로 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 험악하고 외따로 떨어진 것이 이와 같아도 마음으로 이곳을 이미 좋아하게 되자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형수님을 집 뒤에다 장사지낸 다음에는 다시 옮길 수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띠풀로 지붕을 이고 소나무로 처마를 만든 집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합니다. 조와 보리를 먹으며 평생을 지낼 수 있고, 채소와 고사리는 매우 잘 자라 한 번 캐면 대광주리를 가득 채웁니다.” 『연암집』, ‘홍덕보에게 답하는 글(答洪德保書)’

찾아오는 이 없는 두메산골 연암협에서 손수 집을 짓고 먹을거리를 장만하며 근근이 생계를 연명하는 외롭고 궁핍한 삶 속에서도 박지원은 ‘사색하며 글을 쓰는 일’을 단 한 순간도 놓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아버지 박지원을 회상하며 한 줄 한 줄 그 언행을 기록한 박종채의 『과정록』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아버지는 타고난 품성(稟性)이 재물에 대해 욕심이 없고 명리를 좇지 않으셨기 때문에 한가로이 지내며 고요히 앉아 이치를 궁구하고 관찰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연암협에 계실 때 간혹 하루 종일 대청 아래로 내려오시지 않기도 했고, 간혹 사물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참을 말없이 묵묵하게 계시다가 자리를 뜨시곤 하셨다.

당시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지극히 미미한 사물, 예를 들자면 풀과 꽃과 새와 벌레도 모두 지극한 경지를 갖추고 있어서 하늘과 자연의 묘한 이치를 볼 수 있다.’ 매양 개울가 바위에 앉아 나지막한 소리로 읊조리거나 천천히 거니시다가 갑자기 멍하니 서서 마치 모든 것을 잊은 듯한 모습을 하셨다. 그러다가 때때로 묘한 생각이 일어나면 반드시 붓을 잡아 글로 적어두셨기 때문에 잘게 쓴 글씨의 종이조각들이 상자를 가득 채웠다.

아버지께서는 개울가 집에 그 종이조각들을 잘 간직해두셨다. 그리고 말씀하기시를 ‘훗날 다시 살펴서 고치고 다듬어 조리를 갖추고 조목별로 엮은 다음에 책으로 만들어야겠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연암협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1780년 홍국영이 정조의 노여움을 사 권세를 잃었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다시 돌아온 박지원은 서대문 밖 평동(平洞)에 있던 처남 이재성의 집에 거처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삼종형(三從兄 : 팔촌형)인 금성위(錦城尉 : 영조의 셋째 딸인 화평옹주와 혼인해 얻은 부마 칭호) 박명원을 따라가는 자제군관 자격으로 그토록 열망했던 청나라에 가는 기회를 얻게 된다.

5월 길을 떠난 박지원은 6월 압록강을 건너 8월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燕京: 북경)에 들어섰다. 그러나 당시 황제가 열하(熱河)에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그곳에 갔다가 다시 연경으로 돌아왔고, 10월 귀국하였다.

이때의 여행 체험을 기록한 책이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 고전의 역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걸작 『열하일기(熱河日記)』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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