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燕巖) 박지원⑤…입신출세 길 버리고 다시 연암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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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燕巖) 박지원⑤…입신출세 길 버리고 다시 연암협으로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0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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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㉚
▲ 박지원이 안의현감 시절 제작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물레방아를 기념하는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의 ‘연암 물레방아 공원’.

[한정주=역사평론가] 청나라에서 돌아온 이후 박지원은 삼종형인 박명원이 소유하고 있던 삼포(三浦 : 마포)의 세심정(洗心亭)에 거처하는 한편 혼자 연암협에 들어가 지내곤 했는데, 때로는 해를 넘기기도 하고 혹은 반년이 지나 돌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한양과 연암협을 오가며 지내던 박지원은 1783년과 1787년 세 차례에 걸쳐 큰 슬픔을 겪게 된다. 세속의 이욕을 벗어나 서로 마음을 허락하는 우정을 나누었던 절친한 벗이자 동지였던 홍대용이 1873년에 사망했고, 또한 1787년 정월에 아내 전주 이씨를 잃은 것도 모자라 7월에는 아버지처럼 의지하고 지냈던 큰형 박희원마저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예전 연암협에 장사지냈던 큰형수 곁에 나란히 큰형의 묘를 장만했다. 그후 연암협에 들어갈 때마다 박지원은 슬픔과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 개울가에 앉아 스스로 시를 지어 읊조리곤 했다.

당시 박지원이 지은 ‘연암에서 선형(先兄)을 생각하며’라는 시를 보면 세상을 뒤엎을 만한 기개와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구제할 큰 포부를 품었던 그가 혈육에 대해서도 얼마나 깊은 정을 간직하고 있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우리 형님 얼굴과 수염 누구를 닮았는가 / 매양 돌아가신 아버님 떠오르면 우리 형님 바라보았지 / 이제 형님 생각나면 어느 곳에서 보겠는가 / 두건 쓰고 옷 입고 개울로 가서 내 모습 비춰볼 뿐.”

어머니처럼 여겼던 큰형수를 묻은 후 박지원은 연암협을 가리켜 ‘다시 옮길 수 없는 땅’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아버지처럼 의지했던 큰형까지 이곳에 묻었다. 이제 박지원에게 연암협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박지원은 이때부터 1800년까지 무려 10여 년이 넘게 연암협을 마음대로 밟지 못했다. 평생 권세와 명리를 멀리한 채 가난하게 살았던 박지원은 쉰 살이 다 된 늦은 나이에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나갔다. 큰형까지 세상을 떠난 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공감 감역(종9품)에서 시작해 평시서 주부(종6품), 사복시 주부(종6품), 한성부 판관(종5품) 등 여러 관직을 거친 다음 박지원은 1791년 나이 55세 때 한 고을을 직접 맡아 다스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해 겨울 경상도 안의현(安義縣)의 현감(縣監)이 된 것이다.

박지원은 안의현감 직을 자신이 평생 품었던 ‘이용후생학, 경세제국학, 명물도수학’을 민생 현장에서 직접 펼쳐 볼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로 여겼다. 당시 안의현에서 박지원이 행한 사업에 관한 내용은 『과정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께서는 연경에 들어가셨을 때 농기구와 베틀 등 백성들의 실생활에 이롭고 편리한 기구들을 자세하게 관찰하셨다. 그리고 조선에 돌아와서는 이 기구들을 모방해 제작하여 널리 나라 안에서 쓰일 수 있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운 탓에 정작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계셨다. 마침내 안의현에 부임하셔서 재주와 기술이 있는 공장(工匠)들을 가려 뽑아 손수 가르치며 양선(颺扇: 풍력을 이용해 겨 따위를 없애는 농기구), 베틀, 용골차(龍骨車: 논에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수차), 용미차(龍尾車: 관개용 수차), 물레방아 등 여러 기구들을 제조하여 시험하셨다. 모두 힘을 많이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민첩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어 한 사람이 수십 명이 하는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그것들을 모방해 제작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라 안에서 쓰임을 얻지 못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겠는가.”

당시 수차(水車)와 베틀 그리고 물레방아 등을 손수 제작해 이른바 ‘산업과 경제를 잘 다스려 나라와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이용후생에 힘썼던 박지원의 자취는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안의현은 오늘날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인데, 이곳에는 현재 안의현감 시절 박지원이 제작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물레방아를 기념하는 ‘연암 물레방아 공원’이 세워져 있다.

1796년 안의현감에서 물러난 박지원은 이후 충청도 면천군수(1797년)로 나갔다가 다시 강원도 양양부사(1800년) 직을 맡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일찍이 홍대용과 도의지교를 맺고 평생을 함께 하기로 다짐했던 이용후생과 경세제국의 학문과 철학을 실천하는데 온힘을 쏟았다.

면천군수 시절에는 농업 및 토지 개혁과 상업적 농업 및 과학적 영농기술에 대한 자신의 사상과 견해를 담은 ‘과농소초(課農小抄)’와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지어 정조에게 올렸다.

더욱이 양양부사로 부임해서는 환곡(還穀)의 방출과 수납을 조작해 백성들을 착취하는 아전들의 부정비리를 바로잡는 한편 역대 임금들의 필적을 봉안한다는 명분으로 궁속(宮屬)들과 결탁해 관리를 구타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예사로 벌인 천후산(天吼山) 신흥사(新興寺) 승려들의 횡포를 뿌리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감사가 조정의 권세가와 연결되어 있던 승려들을 처벌하려고 하지 않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얼버무리기만 하자 박지원은 아무런 미련 없이 관직을 사직하고 한양으로 돌아와 버렸다.

정조가 사망한 후 권력을 장악한 노론의 권신과 세도가문 아래에서는 더 이상 자신이 품은 개혁의 뜻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해가 1801년이다. 박지원은 더 이상 생계를 위해 벼슬을 하고 녹봉을 받는 것은 구차한 짓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벼슬에서 물러난 박지원은 말년을 어떻게 보냈을까? 그는 지난 날 입신출세의 길을 버리고 선택했던 땅 연암협을 다시 찾아갔다.

더럽고 썩은 세상에 영합해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난날 자신이 품었던 ‘농사짓고, 독서하며, 저술하는’ 삶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당시 박지원의 심정을 일부나마 읽을 수 있는 단서가 『과정록』에 이렇게 적혀 있다.

“관직을 버리고 다시 연암협으로 들어온 다음 아버지는 지난날 개울가의 집에 간직해두었던 글들을 꺼내 보셨다. 그러나 이때는 눈이 이미 심하게 어두워져서 잘게 쓴 글씨를 살펴볼 수 없으셨다. 아버지는 슬퍼하면서 탄식하시기를 ‘아깝구나! 벼슬살이 10여 년에 훌륭한 책 한 부를 잃어버렸구나’라고 하셨다. 이윽고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종국에는 세상에 무용(無用)하고 사람의 마음만 어지럽힐 뿐이네.’ 이에 마침내 개울물에 그 원고들을 세초(洗草)해 없애버리게 하셨다.”

이렇듯 박지원은 죽기 직전까지 연암협과 함께 했다. 평생을 따라다닌 자신의 호 ‘연암’처럼 박지원에게 ‘연암협’은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땅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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