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교(圓嶠) 이광사…“신선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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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교(圓嶠) 이광사…“신선처럼 살고 싶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15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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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의 자호(字號) 소사전(72)
▲ 원교 이광사의 초상.

[한정주=역사평론가] 자(字)는 도보(道甫).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하고 독창적인 서체를 이룩한 서예가이자 정제두에게 양명학(陽明學)을 배워 강화학파를 형성한 사상가다.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했지만 나이 20세 때인 1724년 노론이 옹립한 영조가 즉위하자 벼슬길에 나갈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의 집안은 소론의 명문가였고, 아버지 이진검은 예조판서까지 지낸 소론의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이 51세가 되는 1755년(영조 31년)에는 이른바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그 지방 젊은이들을 선동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남녘의 외딴 섬 신지도로 이배(移配)되었다. 그리고 끝내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 채 73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나이 33세가 되던 1737년(영조 13년) 서대문 밖 원교(員嶠: 둥그재)라고 불리는 나지막한 산 아래에 집을 구해 살았다. 그리고 이곳의 지명을 취해 자신의 호로 삼았다.

이 때문에 그의 호 ‘원교’의 한자는 ‘圓嶠’라고도 쓰고 혹은 ‘員嶠’라고도 쓴다.

특히 ‘원교(員嶠)’는 도가서(道家書)인 『열자(列子)』의 ‘탕문편(湯問編)’에 나오는 신선이 산다는 다섯 산(대여(岱輿)·원교(員嶠)·방허(方虛)·영주(瀛州)·봉래(蓬萊) 등)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원교’라는 호 속에는 신선처럼 살고 싶었던 이광사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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