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만재(保晩齋) 서명응…아들·손자·며느리까지 3대 이은 실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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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만재(保晩齋) 서명응…아들·손자·며느리까지 3대 이은 실학자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19 12: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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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의 자호(字號) 소사전(71)
▲ 보만재 서명응 초상.

[한정주=역사평론가] 자(字)는 군수(君受). 정조 즉위 직후 문치와 개혁정치의 산실로 기획·설치된 규장각의 첫 번째 제학(提學)으로 임명될 정도로 학문과 식견이 뛰어났다.

이후 규장각의 최고 책임자로 활동하며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고 국가 차원의 대규모 편찬 사업을 주도했다. 특히 그는 북학파의 비조(鼻祖)라고 불릴 만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을 중시했다.

이러한 사실은 북학파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에 서문(序文)을 쓴 사람이 서명응과 박지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박제가가 존경의 의미에서 특별히 서문을 청할 정도로 서명응은 외부의 선진 학문과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성호학파나 북학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화사족(京華士族) 달성 서씨(徐氏) 가문의 실학(實學)을 일으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남긴 저술을 모아 엮은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는 정조로부터 ‘우리나라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거편(巨篇)’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학풍은 『해동농서(海東農書)』를 저술한 아들 서호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남긴 손자 서유구, 『규합총서(閨閤叢書)』를 쓴 손자며느리 빙허각(憑虛閣) 이씨 등 무려 3대까지 이어져 가장 번성한 ‘실학자 가문’을 형성했다.

문치와 실학에 대한 공적뿐만 아니라 정조와 맺은 충의(忠義)의 인연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아 그의 나이 65세가 되는 1780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 정조가 ‘만년(晩年)에도 절개를 잘 지켰다’는 뜻을 담은 ‘보만(保晩)’이라는 호를 내렸다.

이로 말미암아 노년에 자신의 집 이름을 ‘보만재(保晩齋)’로 바꾸고 또한 호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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