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 김정희⑦ 한국사 최고의 ‘작호(作號)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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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⑦ 한국사 최고의 ‘작호(作號) 달인’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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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㉑
▲ 추사 김정희의 자화상. <선문대학교박물관 소장>

[한정주=역사평론가] 김정희에 관한 인문학자나 미술사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김정희의 생애는 크게 다섯 시기로 구분해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① 15세(1800년) 무렵 박제가를 만나 북학의 뜻을 배우고 익힌 때부터 청나라에 다녀온 25세(1810년) 때까지, ② 청나라에서 돌아온 25세(1810년) 때부터 대과(大科)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34세(1819년) 때까지, ③ 과거 급제한 34세(1819년) 때부터 제주도로 유배 간 55세(1840년) 때까지, ④ 55세(1840년) 때부터 63세(1848년) 때까지 8년3개월간의 제주 유배 생활, ⑤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63세(1848년)부터 사망한 71세(1856년) 때까지의 말년 생활 등이다.

그런데 김정희는 삶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자신이 추구한 뜻을 한껏 드러낸 수많은 호를 지어 사용했다. 수 백 여개에 달하는 김정희의 호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탁월한 ‘작호(作號)의 달인’이었는지를 새록새록 깨닫게 된다.

그는 어떠한 구속에도 따르지 않고 또한 어떤 장애에도 굴복하지 않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작호(作號)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호는 그저 자신의 뜻이 향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지으면 된다는 것이 김정희의 ‘작호관(作號觀)’이라고 해야 할까?

다시 말해 호는 지식인의 고상한 취향도 아니고,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권위의 수단도 아니며, 특정한 계층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지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호다. 자신의 삶과 뜻만 진실 되게 담고 있다면 어떻게 짓더라도 상관없는 것이 다름 아닌 호라는 얘기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김정희가 삶의 변곡점이 되는 각각의 시기마다 어떻게 호를 짓고 그것을 사용했는가에 대해 알아보자.

김정희가 처음 사용한 호는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현란(玄蘭)’이었다.

현란은 묵란(墨蘭)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는데, 묵(墨)은 선비가 갖추어야 할 문방사우(文房四友) 중의 하나이고 난(蘭)은 선비를 상징하는 사군자(四君子)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현란’이라는 호는 자신이 선비임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청나라 연경에 가기 이전 김정희는 현란과 추사라는 호를 썼고, 연경에 도착해서는 완원과 옹방강을 만나 교류하면서 완당과 보담주인 등의 호를 얻었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보담주인과 비슷한 뜻을 갖는 보담재(寶覃齋) 혹은 담재(覃齋)라는 호를 썼다.

완당이라는 호 또한 완수(阮叟), 노완(老阮), 완당노인(阮堂老人), 완암(阮盦), 완방(阮舫), 경완(庚阮), 완당노숙(阮堂老叔), 완당학사(阮堂學士), 병완(病阮) 등으로 자유롭게 변형되어 사용되었다. 완원과 함께 소동파(蘇東坡)를 흠모하는 마음을 담아 ‘완파(阮坡)’라고 하기도 했다.

▲ 추사가 친구인 황상에게 써준 ‘죽로지실’. ‘대나무 화로가 놓인 방’이란 뜻으로 전서의 필획을 살려 쓴 예서 작품이다.

청나라를 다녀온 지 2년이 지난 1812년 무렵에는 옹방강이 써서 보내준 ‘시암(詩盦)’이라는 글씨를 호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시가 있는 집’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특히 김정희는 청나라 학자들과 글과 편지 등을 통해 교류할 때 ‘자신은 조선 사람이다’라고 자부하는 의미를 갖는 여러 가지 호를 사용했는데, 동해제일통유(東海第一通儒)·해동추사(海東秋史)·동해순리(東海循吏)·동해둔사(東海遁士)·동해서생(東海書生)·고계림인(古鷄林人)·천동(天東)·동방유일사(東方有一士)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돌아온 이후 고증학과 금석학의 독보적인 권위자로 거듭난 김정희가 자신만만하게 스스로를 드러낸 호를 들자면 단연 ‘실사구시재(實事求是齋)’와 ‘상하삼천년종횡십만리지실(上下三千年縱橫十萬里之室)’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상하삼천년종횡십만리지실’은 김정희의 호 중 가장 긴 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시간적으로는 3000년, 공간적으로는 10만 리에 걸쳐 있는 학문과 지식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김정희의 남다른 자부심이 가득 담겨 있다.

이 호는 옹방강이 직접 새겨 보내준 인장에 적혀 있던 ‘동해제일통유(東海第一通儒)’라는 호와 함께 당당하다 못해 거만하기까지(?) 했던 김정희의 내면세계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과거에 급제한 이후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던 김정희의 관직 생활은 나이 55세인 1840년(헌종 6년)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 조정 안팎의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세도가문인 안동 김씨들이 앞장서 이미 세상을 떠난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의 사건을 다시 들춰내 그 배후로 김정희를 지목해 누명을 씌운 다음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보냈기 때문이다.

최완수 선생은 이때의 일을 두고 우의정 조인영, 형조판서 권돈인, 병조참판 김정희로 대표되는 반(反) 안동 김씨 세력에 대한 안동 김씨의 공격으로 보았다. 특히 안동 김씨의 칼날은 잠재적으로 정치적 경쟁 세력인 명문가 경주 김씨의 종손이었던 김정희를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었다.

당시 김정희는 국문을 받던 중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다행히 옛적 함께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순수비를 탐문하기도 했던 절친한 벗 조인영이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간곡한 상소를 올려 그나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정희는 오히려 육신의 자유를 구속당한 제주도 유배 생활 도중 ‘세한도(歲寒圖)’와 같은 우리 예술사에서 길이 빛날 위대한 걸작을 남겼다.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의 푸르름이 더욱 빛을 발하듯이, 김정희의 예술혼은 혹독한 환경을 만나자 오히려 활짝 만개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정희는 당시 어떤 호를 지어 사용했을까? 이 시기에 김정희는 자신이 귀양살이하던 대정현(大靜縣) 포구(浦口)에서 글자를 취해 지은 ‘정포(靜浦)’라는 호를 많이 사용했다.

또한 귀양살이 도중 회갑을 맞아서는 자신이 태어난 1786년과 회갑 연도인 1846년의 병오년(丙午年)에 빗대어 ‘병오노인(丙午老人)’이라는 호를 쓰기도 했다.

▲ 추사 김정희의 ‘부작란도’. 김정희의 묵란도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으로 ‘불이선란도 (不二禪蘭圖)’라고도 불린다.

나이 63세가 되던 1848년 12월6일 비로소 유배지에서 풀려나 다음해 1월 한양으로 올라온 김정희는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난 1851년 7월까지 한강변에 거처를 마련해 생활했다. 그리고 1년이 조금 넘는 북청의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이후에는 과천에 머물며 말년을 보냈다.

이미 늙고 병든 몸에다가 편안하게 머물 곳조차 찾지 못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닌 이 참담하고 암울한 시기 동안 역설적이게도 김정희는 가장 다채롭고 흥미로운 작호(作號) 활동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육신은 비록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지만 정신만은 여전히 푸르른 젊음에 머물렀던 김정희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준다.

먼저 김정희는 자신이 거처하던 금호(琴湖: 서울시 성동구 금호동의 동호(東湖) 인근을 지칭)의 지명에서 취해 ‘금강(琴江)’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또한 노량진 앞 한강 부근을 일컫는 노호(鷺湖)의 아름다운 풍경을 뜻하는 ‘삼묘(三泖)·삼묘노어(三泖老어)’라는 호를 썼다. 그리고 지금의 마포를 가리키는 삼호(三湖)를 취해서는 ‘삼호의 어부’라는 뜻으로 ‘삼호어수(三湖漁叟)’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호(號)의 옛 글자인 고(沽)를 취해 ‘삼고(三沽)’라는 호를 짓는 기지를 발휘한 때도 이 무렵이다.

이밖에도 김정희는 노호(老湖), 노호(鷺湖), 강상(江上), 금상(琴上), 용산(蓉山: 서울 마포구 용산 부근에 연꽃 피는 곳이 있어 생겨난 별칭), 용정(蓉井) 등 한강변에 살던 자신을 때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호로 드러냈다.

그리고 남은 삶 동안 그냥 이름 없는 강변의 늙은 어부나 나무꾼처럼 살고 싶다면서 ‘노어초(老漁樵)’라는 호를 사용하는 한편 매화의 고결한 품격을 자신의 인격에 비유하여 ‘매화구주(梅花舊主)’라는 호를 짓거나 생명이 막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하는 봄날과 동틀 무렵의 새벽을 빗대어 ‘춘효거사(春曉居士)’라는 호를 쓰기도 했다.

심지어 한강변을 정처 없이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자신과 동일시하여 ‘갈매기 구(鷗)’자가 들어가는 ‘삼십육구주인(三十六鷗主人)·칠십이구당(七十二鷗堂)·노구(老鷗)·동해한구(東海閒鷗)’ 등의 호를 짓기도 했다.

생애 마지막 4년을 보낸 과천(果川)에서는 유독 그 지명에서 취한 ‘과(果)’자가 들어가는 호를 많이 사용했다. ‘과노(果老)나 노과(老果: 과천의 늙은이)·과농(果農: 과천의 농부)·과도인(果道人: 과천의 도인)·과정(果丁: 과천의 문지기)·남충(南充: 과천의 옛 지명)·과남(果南: 과천의 남쪽)·과월(果月: 과천의 달)·과전(果田: 과전의 밭)’ 등이 그것이다.

또한 과천 시절 거처한 과지초당(瓜地草堂)에 비유하여 ‘과우(果寓: 과천의 집)’라는 호를 쓰기도 했다.

이밖에도 김정희는 유(儒)·불(佛)·선(仙)을 두루 섭렵하며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구가했던 자신을 한껏 드러내는 다채로운 호를 사용했다.

먼저 불가(佛家)와 관련해서는 ‘부처’라는 뜻의 ‘나가(那迦)’라는 호를 썼고, 여기에서 파생되었다고 할 수 있는 ‘나산노인(那山老人)·나옹(那翁)·염나(髥那)·노가(老迦)·나가산인(那伽山人)·나수(那叟)·염나(髥那)’ 등을 사용했다.

또한 불교용어인 ‘정혜쌍수(定慧雙修)’에서 유래한 ‘쌍수(雙脩)·쌍수도인(雙修道人)’, 부처가 되기 위해 수도하는 ‘바라밀(婆羅密)’에서 연원한 ‘단파거사(檀波居士)·찬제(羼提)·찬제거사(羼提居士)·찬제각(羼提閣)·과파(果波)·노파(老波)·밀암(密庵)’ 등의 호를 지어 썼다.

비로자나불이 거처한다는 연화세계(蓮花世界)에 비유해 ‘승련노인(勝蓮老人)·화지(華之)’라고 하거나 고기를 먹으면서 두타행(頭陀行)을 한다고 해서 ‘육식두타(肉食頭陀)’라고 하는가 하면 ‘부처의 노예’라는 뜻으로 ‘불노(佛老)’라고 하고, 다시 부처가 고행(苦行)한 곳이라고 알려진 설산(雪山)의 소에 비유해 자신을 ‘설우도인(雪牛道人)’이라고 하기도 했다.

선가(仙家)와 관련해서는 신선들이 모여 산다는 삼신산(三神山) 중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에 빗대어 ‘봉래산의 나무꾼’이라는 뜻의 ‘봉래산초(蓬萊山樵)’와 ‘소봉래(小蓬萊)·소봉래학인(小蓬萊學人)’이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다.

또한 신선들이 사는 선경(仙境)이자 신화에서 천제(天帝)의 장서(藏書)가 있는 서고(書庫)라고 전해오는 ‘낭환(琅嬛)’에서 유래한 ‘동해낭환(東海琅嬛)낭경인(琅瞏人)·우낭환선관(又琅嬛僊館)’ 등의 호도 썼다.(최준호 저, 『추사, 명호처럼 살다』, 아미재, 2012. p523〜615 참조)

그렇다면 한국사 최고의 작호 달인 김정희가 마지막으로 지었던 호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과칠십(果七十)’과 ‘칠십일과노인(七十一果老人)·칠십일과(七十一果)’였다.

70세가 되는 1855년에는 ‘과천의 칠십 세 늙은이’라는 뜻으로 과칠십(果七十)이라고 했고, 사망한 71세에는 ‘칠십 일세의 과천 늙은이’라는 뜻의 칠십일과노인(七十一果老人)이나 칠십일과(七十一果)를 자호로 삼았다. 참으로 친근하고 간결하고 단순하면서도 담박한 호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마지막 순간 김정희가 자득한 ‘작호(作號)의 미학(美學)’은 특별함과 기이함과 고상함과 우아함이 아닌 바로 평범함 속에 있었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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